사막 정착민
2021. 6. 26.

 

 

1.


  마사는 잘 알지 못하는 분야를 선망하는 일은 드물어도 감정이 관여하는 영역을 등한시한 만큼 멋쩍어 했다. 데보라 영 여사의 경우 음악을 알기 전 사람을 알아 선 바깥에 두었다. 미하일과는 내외했는데, 그가 첫만남에 자신을 피해 도로시의 뒤에 서 있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찻잔과 브랜디글라스로 만나 이름을 알았다는 것을 나중에야 떠올렸지만 고립된 호텔 내에서 거리를 좁히는 편이 각별하므로 자연스러웠다. 이디스는 예외적이었다. 마사는 예술가의 영감 어린 총기를 볼 때마다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했고 랄프 그린우드와 이디스 노섬브리아를 볼 때 비슷한 감상을 받았다.

  예술이 몰이해의 영역이라면, 오히려 그리하여 믿음의 지분을 지니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만 이십 년을 군에서 보낸 자신보다 어떻게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는 기질이었다. 만찬에서 재회하여 혼란에 빠질 때 마사는 해결책을 모방하고자 어렵지 않게 이디스를 떠올렸다.

  얼마 전 인형사에 관한 환상은 한 차례 정정되었다. 시작은 유령을 파이로 꾀어내는 술수에 왜 자신을 골랐는지 연유를 묻는 것이었다. 마사는 담백하게 말했다. 자네밖에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소.

  이디스는 아무리 무서워도 가만히 골몰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마사는 죽음 아래 무신경했기에 두 사람은 약속한 것처럼 식사를 하고 바다를 보러 호텔을 나섰다. 흠 많은 서비스 가운데서 마사는 가벼운 충동으로 오랜만에 군화를 벗고 모래를 밟았다. 파도가 한 차례 밀려왔다가 쓸려나갈 때, 이디스는 군인의 삶에 호기심을 품는다. 그는 조심스러워도 총명한 눈을 반짝이며 피바람 대신 바다에 나부끼는 옷깃을 붙들고 입을 열었다.

  마사는 보란 듯이 성공한 이디스의 삶을 은연중에 동경하느라 특히 사양하고 싶었지만, 평소의 당연한 거절이라기에는 이디스의 눈빛을 완곡하게 꺾지 못했다.

 

  “결국 무의미한 이야기인데. 자네에게 들을 가치가 없지 않겠소?”

  “이 자리에 당신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이 어찌 무의미한 일이 되겠나요. 사람의 삶을 축약해서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다고 말하는 건 너무 슬픈 일이에요.”

  “내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이 부끄럽다 해도?”

  “누구에게나 그런 부끄러운 일이 있어요.”

  접근법은 상담보다 대화였다. 인형사는 독창성과 대중성의 중도를 아는 사람이었기에 방아쇠를 대신 당겨주었다. 마사는 선선한 목소리를 속으로 따라해보며 입을 열었다. 예의를 아는 사람이라면 배우자가 죽었다는 데에서 캐묻는 것을 그만두었을 텐데, 이번은 상황이 달랐다. 아버지를 통해 침잠한 열패감에서 시작해 목발을 짚던 이야기를 차근히 풀자, 이디스는 인형을 만들고 싶는 의사를 내비쳤다. 값은 돈보다 값진 우정으로 지목했다. 마사는 느리게 종이 두 장을 얻어 대가를 치른다.

 

 

 

 

2.

 

  마사에게 아이는 멀고 먼 존재였다. 그는 유령의 진범을 잡았을 때 예상이 들어맞은 것과 별개로 크게 실망했는데, 아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공자비에게 피를 내어주고 얻은 문제의 실마리가 짜맞춰지는 것은 이득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몽 사이로 외나무다리를 걷는 아이를 위해 나서서 보호할 위인은 못되었다. 마사는 뺨을 짓누르며 주세페와 주스를 나누어 마시는 메리의 구슬 같은 눈을 바라보았다. 괴리감이 느껴질 만큼 낯선 아이를 보면 작은 피로가 쌓여갔다.

  일개 투숙객으로 남으려면 짐을 바깥으로 돌려줄 상대가 필요했다. 총지배인이나 알리체에게 선을 긋고 물러나지 않을 기백이 있고, 다른 투숙객을 쉽게 설득할 수 있는 권위나 힘을 가져야 한다. 더불어 메리와 가깝거나 어린 아이에게 동정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어느 것도 해당사항이 없는 마사는 릭과 헤어지는 길로 그리고 날이 밝는 대로 데보라를 찾았다. 적어도 그 사람이라면 겁을 집어먹더라도 의무는 착실히 기름으로 분리해낼 것 같았고 마사는 가끔 주먹보다 목소리의 힘에 의지했다.

  객실을 나설 때 루시엔과 마주친 것은 미세한 행운이었다. 태평하게 웃는 안색에 피로가 묻어나도 아이를 대하기에 자신보다 나았으니, 그의 귀족적인 사교술만큼은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정원의 숨바꼭질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메리는 금세 투숙객들의 이름을 외며 목소리를 높였고, 마사는 노란 장미를 화병에 내버려 두었다. 이만하면 공자비가 카를의 목을 매달아도 메리만큼은 살 수 있으리라고, 그는 막연한 불안을 놓아두기로 했었다.

 

  시름을 내려놓을 때 데보라가 말했다.

  네, 알겠어요. 그렇게 하지요.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도 책임을 다하려 드는군요.

 

  이성과 절제의 여사에게는 최고의 칭찬이었고, 거머리는 종아리에 달라붙었다.

 

 

 

 

3.

 

 

  마사는 이디스에게 힘있게 눌러쓴 종이 두 장을 건넸다. 한 장에는 볼로냐 대학과 하숙집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이곳으로 편지를 보내면 이디스가 바라는 대로 또다른 골방의 예술가를 만날 수 있을 터였다. 다른 장에는 당부가 고작이었다.

 

  「이 종이를 가진 이디스 로웨나 노섬브리아에게 그림 한 장을 그려주시오.」

 

  이디스는 한 줄짜리 유언에 표표하게 드러난 감정을 토로하는 대신 정성껏 공방 주소를 적어주었다. 배우자의 어떤 표정을 가장 좋아하셨나요? ……웃는 얼굴일 테요, 아마. 나 때문에 많이 웃을 수 있길 바라서……. 마사는 대답을 옮겨 인형에 새기는 이디스를 천천히 그려보기만 했다.

  납작하게 엎드려 비는 정원사를 지나쳐 다과회에 처형대를 세운 붉은 여왕은 피로 찻물을 보탰다. 고깃덩이를 도려낸 칼을 든 알리체가 바닥을 구르는 머리채를 집어 승기처럼 들어올렸다. 참석자들이 침묵해도 명령은 떨어졌다. 마사는 그가 무어라 말했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이미 만찬의 장은 상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을 곳으로 변질되었다. 델가도 신부를 선두로 공자비는 시종을 보내 장미를 칠하지도 않은 구경꾼들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마사는 만찬에서 그랬듯 제자리에 얼어붙어 상황을 직시하고자 했는데, 그 대신 델가도의 눈과 또렷이 마주쳤다. 애꿎은 희생자를 만든 것보다 선택을 유보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미련했다. 공자비는 여행자와 지배인의 목이라도 손수 거둬갔을 것이다. 사형수의 지위, 연령, 생각 그 무엇 하나도 들여다보지 않고. 그러나 마사는 그에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마사 자신을 원망해야 할 일도 아니다.

  좋은 곳에서 잘 살다 잘 죽고 떠나는 게 그리 큰 욕심이었나. 조금도 허락되지 않았던 사치를 꿈꾼 것을 문책해야 하는지, 마사는 화살을 바깥으로 돌릴 여지를 찾지 못한 채 묵혀두었다. 펜잔스의 흙더미와 대륙을 잇는 바닷물이 담긴 델가도의 눈이 말했다. 내가 대신 기도하리다. 죄와 벌을 덜어내리다. 그러니 눈을 감고 손을 모으시오. 마사는 홀린 듯 양손 대신 지팡이를 쥐었다가 불에 데인 것처럼 던져버렸다. 왕홀처럼 든 델가도의 머리에 맞았고, 공자비가 돌아보았다. 마사는 습관적으로 상대에게는 도려내진 목 어귀를 움켜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붙어있는 대신 감싸고 있는 것은 없었다. 아래로 손을 쓸어내리니 걸리는 것도 없다. 아내는 인형사에게 맡긴지 오래다. 칠 년 전의 군인은 웅크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뒤를 돌아보는 것이 더욱 아찔했다.

 

  “대위님, 이쪽입니다!”

 

  송연한 가슴을 부여잡지 않아도 날선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한 사람에게만 충성스러운 목소리에 마사는 내색하지 않아도 크게 놀랐다. 이 안에는 루카스와 도로시가 있다. 기도하는 대신 죽음을 달라는 요구를 절대로 들어주지 못할 청년들이……. 나는 그들의 앞에서 투신해서는 안 된다. 마사는 이미 한 번의 실수를 저질렀다. 광장에 카를이 매달린 며칠 뒤 홀로 가던 길, 하루는 루카스가 객실까지 에스코트를 했다. 망령에 시달리던 마사는 서서히 진정한 뒤 지팡이를 짚고 물었다.

 

  카를 공자의 일은 두렵지 않았나.

  군이 됐으면 매일 같이 보는 게 시체였을 텐데 뭐가 무섭겠습니까?

  앞으론 어떻게 할 생각이고.

  앞으로는 뭐, 목숨만 부지하면 되죠.

  그래, 그거면 되었네. 변치 말아주게.

 

  그리고 마사는 사과했다. ……미안하게 되었소. 루카스는 마사가 방문을 닫을 마지막까지 그 말을 받지 않았다. 루카스가 말하길 대위는 변하지 않는다 했다. 루카스를 볼 낯이 없어 군인 시절을 도려내고자 한 만큼 한참 달라져 있었는데도. 도로시도 말했다. 돌아가고 싶어요, 마사. 이끄는 목소리가 없었다면 사람들을 쉽게 돌아보지 못했으리라고 마사는 확신했다.

 

  대위님 성격 그대로인 거, 호텔 판도라 조금만 돌아다녀도 알 수 있습니다. ……저한테 하는 행동도 옛날과 변함없고 말입니다.

 

  그 말에 회피하고자 한 책임은 다시 무게로 돌아온다. 메리를 도와야 한다는 의무. 루시엔과 데보라에게 위탁했으나 저울에 매단 추를 떨어뜨렸는지 도로 기운다. 이제 나누어 받아내야 할 몫이다.

 

 

 

 

4.

 

  도로시와 함께 산책을 하며 5층의 지리를 보아둔 것도 쓸 곳이 있었다. 메리는 무겁게 벽이 울리는 소리에 뛰쳐나갔다. 마사는 반사적으로 그 뒤를 좇았다. 거머리는 수영장의 물가를 찰박거리며 헤치는 동안에도 여전히 다리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비슷한 생각을 한 자들이 더 있었는지 같은 길로 가던 이들이 모여있을수록 메리의 기척을 감지하기 어려워졌다. 마사가 가장 돌아갈 만한 길을 골라 앞장섰고, 떠났다.

  벽면에 드라이버와 펜치를 걸고 볼트와 너트가 굴러다니는 작업실의 사이, 메리는 쪼그려 앉아 정원 가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사는 동그란 구두를 신은 자그만 발 두 짝을 놓치지 않았다. 유령 분장을 한 주세페가 메리에게 주절거리며 라즈베리 파이를 쪼개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청년은 좋은 표본은 아니었으나 마사보다는 나았다. 조심스레 벽에 등을 기대고 옷깃의 냄새를 맡던 찰나, 메리는 마사가 그 자리에 있다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노란 장미.”

  “그래, 나요. 자네가 너무 빠르게 가길래.”

  “쫓아올 필요는 없었어요. 혼자서도 잘 숨을 수 있어요.”

  “알고 있소. 일단 그것부터 내려놓게.”

 

  마사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할 어린 아이를 설득할 능력은 없었고, 미소로 신뢰를 얻을 능력은 더욱이 부족했다. 그는 허락을 구하듯 메리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피로한 얼굴로 다가섰다. 차라리 물감이었으면 나았을 텐데 옷을 벅벅 문질러도 피가 지워지지 않았다. 메리가 퇴로를 응시하고는 눈치를 보며 가위를 책상 안쪽으로 밀어두었다.

 

  “자네는 그걸 쓸 데가 없잖나.”

  “있어요, 꽃은. 정원까지 갈 수 있다면요.”

  “정원까지 가면 무엇 하나?”

  “거기에는 장미가 있어요. 아, 여기에도.”

 

  마사가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메리는 우물쭈물거리는 눈으로 마사를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어린 아이의 치기였다. 그래도 메리가 103호까지 함께 내려가길 바랐다. 불타는 파리에 남겨질 뻔했던 자신처럼, 메리가 유혈의 상황을 깨닫기 전에 품에 안기길 원했다. 안아보지도 못한 사람이 죽는 건 하나만으로도 족했다.

  메리는 한 걸음 물러나서, 슬금슬금 복도로 돌았다. 마사는 걸음이 무거워도 어린 아이를 놓칠 정도로 체력이 녹슬지는 않아 뒤를 따랐다. 아이가 다람쥐처럼 속도를 내 얼핏 보였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며 주방을 거쳐 볼링장에 다다랐다. 마사가 메리만 보고 좇을 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당연히 오해일 것이다. 메리는 이제 볼링공 받침대 뒤에서 복실한 단발머리를 매만졌다. 계속 자신을 쫓아오는 마사 때문에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아이가 두렵지 않을 표정을 고민하던 마사는 겨우 손을 내밀었다.

 

  “아저씨한테 데려다주마. 자네도 알지, 그 숨바꼭질.”
  “거짓말. 아저씨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알아요?”

  “이제부터 찾으면 되고.”

  “안 갈래요.”

 

  메리가 볼링레인 위에 올라 물러났다. 도로시와 공을 떨궜던 레인과 같았다. 


  “그러다 자네가 다치면 나는 모르오.”

  “다치지 않아요. 도망치면 되니까. 무섭긴 하지만……. 합.”

 

  메리의 시선이 마사의 뒤쪽을 향할 때, 마사가 도로 돌아보자마자 메리는 레인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차라리 볼링공처럼 거터로 빠지면 좋을 텐데, 마스킹 유닛의 뒤로, 어두운 곳으로…….

 

 

 

 

5.

 

  In nomine Patris, et Filii, et Spiritus Sancti…….

  Amen.

 

 

 

 

6.

 

  델가도의 시신을 안치하고 몸을 일으키자 옷깃에 피가 배어들었다. 뼈에는 닿지 않았어도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팔 안쪽부터 팔꿈치까지 그어진 상처는 점차 신부의 피와 섞여 드러나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감이 아래로 떨어지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장갑을 버리는 것이었다. 마사는 다 쓰고 남은 젖은 수건으로 몇 번 상처를 두드려 닦고 지체할 여지 없이 객실을 떠났다. 387호실은 막다른 길이었고, 그나마 찾은 통로는 위로 나 있었으므로 한 층 위로 돌아가야 했다.

  4층에 올라서자, 한 곳에 통로가 둘 있을 리 없으므로 내려가려면 복도를 걷는 일을 감행해야 했다. 마사는 한 방문 앞에 멈춰섰다. 안에서 자그만 쥐 울음소리가 들리는데,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사는 지체없이 옆에 난 직원 숙소의 안으로 들어섰다. 점차 배와 팔에 난 상처가 벌어지고 있어 마땅히 덧댈 천을 찾아야 했던 차였다. 그 순간 마사의 눈에 테이블보가 들어왔다.

 

  “꺄악!”

 

  테이블보를 쓸어가자마자 반사적으로 여자가 비명을 지른 탓에 마사는 덜컥 내려앉는 심장을 붙들지도 못한 채 눈썹을 찡그렸다. 새앙쥐가 아닌 사람의 흉내였다. 동시에 옷장의 문이 기울어졌다. 일행이 기다란 지팡이를 번쩍 치켜올렸다. 마사는 반사적으로 판단했다. 호텔 내에 사람을 데리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여성이라면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이디스!”

 

  두 개의 지팡이가 허공에서 부딪히고, 마사는 손을 돌려 아래로 이디스의 지팡이를 내렸다. 짧게 호흡이 끊어져도 지팡이를 막아낼 힘은 있었다. 이디스와 메리는 놀란 눈이었다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사….”

  “비, 비명을 질러서 죄송해요…….”

  “됐네, 나도 누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으니 다를 바 없소.”

 

  눈앞이 아찔했지만 화를 낼 기백은 없어, 마사와 메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메리는 비로소 제 식탁보를 들춘 이유를 깨달았다.

 

  “팔에 상처가 깊으신데요…!”

  “……그렇게 되었네.”

 

  메리는 비록 떨리더라도 야무지게 천을 찢어냈다. 마사는 그것을 받아 끝은 이에 물고 팔에 칭칭 감았다. 이디스가 물었다.

 

  “메리의 뒤를 쫓아가는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요, 마사.”

  “메리는 볼링장에서 만났소. 볼링레인 너머에도 통로가 있던 모양인데, 결국 놓치고 말았네.”

  “그 다음에 시종을 만난 건가요.”

  “그냥 5층에 오래 머무르는 바람에 공자비와 마주칠 수밖에 없었던 거요.”

 

  차마 델가도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다과회장으로 되돌아갔다는 말은 할 수 없어, 마사는 거짓을 절반 고하기로 했다. 피비린내에 죄는 덮일 테니 지나고 나면 잊혀질 테다. 마사는 찢어진 옷깃을 묶어 붕대를 덮었다. 이 정도면 사람을 더 만나더라도 표가 덜 난다.

  낙오자를 찾고 있었다는 이디스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은 모른다고 했다. 어린 메리는 사람이 많은 곳이면 더 잽싸게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상자 안의 상황을 일러준 이디스가 창문으로 다가가 사다리를 가리켰고, 큰 메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사다리는 이곳에서 다시 아래로 내려갈 탈출구였다. 머릿수를 하나 늘리는 데에는 여러 위험이 뒤따르지만, 그는 이디스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가장 늦게 내려갈 심산으로, 사다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자 두 작은 머리가 점차 까마득한 구멍으로 사라졌다. 얼마 기다리자 가볍게 사다리가 두 번 진동했다. 이디스가 사다리의 아래를 잡아 단단히 고정했기 때문이었다. 마사는 신호에 화답했다.

 

 

 


7.

 

  “자네는 봐주는 사람이 없는 예술품만큼 무가치한 것은 없다 했는데. 별다른 기대 없이도 찾아봐주었군.”

  “아까와 같은 이야기로군요. 누군가는 지고 가야 하는 의무였다고요. ……사람의 삶은 모두 예술로 치환되지 않아요, 저도 마찬가지로요.”

  “그 뜻으로 말한 게 아닐세.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오.”

  “하지만 메리를 찾으러 가시지 않았나요.”

  “…….”

  “……마사?”

  “그런가, 그렇군.”

 

 

 

 

8.

 

  릭 베레스는 미국의 사회부 기자였다. 포도나무 농장에 어울리는 녹빛 눈동자로 새 가십거리를 찾아 헤매는 까마귀였고, 동시에 마사에게 비바 갈레타에서 가장 만만한 자들 중 하나였다.

  마사는 그의 인터뷰 대상이 된 이후 릭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정확히는 의뢰였다. 첫머리부터 지배인을 문책하며 매듭을 잘못 엮은 자신을 대리해 알리체와 메리의 관계를 질문해달라는 것으로, 보수는 딘 쉘튼과 마일즈 스트릭랜드의 정보로 달았다. 조건은 메리 펜마크 양의 개인사를 신문에 내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헤드라인에 유명한 자산가의 불륜 상대를 폭로할 정도로 앞뒤를 가리는 자질은 없었지만, 아이의 보호라는 이유에는 수긍했다.

  릭은 총지배인을 꾀어내어 마사와 함께 공자비를 주제로 가벼운 상담을 진행했다. 고위층 인사에 관한 내용은 새어나가면 안 되는 엄연한 기밀이었다. 마사는 팔이 덜렁거린다는 릭의 핑계로 옆자리에 앉아 속기하듯 받아적었다. 두 사람은 물과 기름 같으면서도 정보를 맞추는 데에는 합이 맞았다.

  마사는 수첩을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낙서만 최선으로 남겨 돌려주었고, 릭은 어처구니를 잃었다. 그리고 보도할 수 없는 기삿거리를 일러주었을 때, 그가 제 시무룩한 얼굴이 미국인의 행복한 얼굴이라는 변명을 할 때 릭의 토라진 표정을 읽었다. 마사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졌다. 도로시와 루카스를 제하고 누군가를 대하기 어려울 이유가 없는 건 물론이나, 어린 청년은 특히 그 속내가 훤히 보였다. 게다가 그에게는 정체되지 않은 열망이 있었다. 영국인과 미국인의 차이처럼, 릭과 마사가 미세하게 근본을 달리한 탓도 있었다.

 

  다음 열차를 탈 수 있을 것 같나?

  탈 수 있어야죠.

  무슨 확신을 갖고?

  아직 열차에 대해 무슨 문제가 있었다는 말은 들리지 않았으니까요. 스케일도 크잖습니까?

 

  아, 저 청년은 돌아갈 수 있겠군. 마사는 시간을 겹겹이 쌓아 실패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지만, 릭은 현실적이면서도 좋을 방향으로 생각할 줄 알았다. 릭은 마사로 하여금 해상열차가 오지 않을 가능성을 깨닫고 자경단을 고려했지만, 마사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군사학을 이십 년 깨우친다 한들 그의 가정법이 옳았다. 잃어버린 열정을 돌려받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아도, 마사 비록 총지배인이 의심스럽더라도 내심 릭이 이기길 바랐다.

  의뢰 이후 그는 꾸준히 호텔을 누비고 다녔기 때문에 통 볼 일이 없었는데, 제시 위젠필드의 객실에서 재회할 수 있었다. 미하일을 찾고 헤어졌던 루시엔은 물론 헤이스, 주세페도 침잠한 눈치로 단서를 찾고 있었다. 루카스가 마사의 뒤를 따랐다. 비밀경찰이라 주장한 그 자가 남겨둔 실마리는 운 좋게도 마사의 눈에는 보이는 곳에, 릭은 베개를 뒤집느라 놓칠 곳에 들어있었다. 델가도 신부의 머리를 받치느라 높은 베개의 솜을 빼냈던 경험 덕이었다. 마사가 베개 커버 틈새의 종잇조각을 집자마자 말 한마디가 떨어졌다.

 

  “주십쇼.”

 

  제시가 군인은 아니었던 만큼 증거를 추합하는 일은 릭에게 맡겨야 타당했다. 마사도 단서를 차지하는 것에 큰 미련은 없었다. 마사는 릭에게 쪽지를 넘기려다가 갑자기 움켜쥐었다.

 

  “어차피 같이 볼 건데 누가 들고 있든 상관없지 않나?”

  “그래도 제가 펼쳐볼 겁니다. 제가 찾은 쪽지이니 제게 주세요. 안 됩니까?”

  “글쎄.”

 

  릭이 마사가 본디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짖궂은 심술을 부리는 것은 질시에 속했다. 릭 베레스는 다음 열차에 오를 사람이었고, 그렇지 않은 그는 상상할 수 없다. 시시각각 낯빛이 변하는 그가 실패할지언정 완전히 패배할 수는 없기에, 마사는 늑장을 부린 다음 쪽지를 넘겨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릭이 단서를 추합하길 제안해줬으므로, 마사는 협조하려 수첩을 받아든다.

 

 

 

 

9.

 

  “그 애가 없었다면 우린 대연회장에서 공자비에게 이미 죽었을 겁니다.”

  “그래, 함께 도망쳤잖소. 겁먹은 채 다시 달아났고. 쫓아가봤지만, 놓쳤지.”

  “찾으러 가야겠습니다. 이곳에서는 할 일을 마친 것 같네요.”

  “같이 가지. 보아하니 메리는 토끼굴에 갇힌 토끼꼴이야. 이쪽 통로에서 소리가 나면 저쪽으로 도망가고, 저쪽 통로에 그림자가 어른거리면 이쪽으로 오지. 그래봤자 토끼굴 자체를 벗어나진 못해. 아니, 않는 것에 가깝지. 이 통로에서 저 통로로 다닐 뿐일세.”

 

  모순적이게도 마사는 편견을 극도로 혐오하는 만큼 남을 배척했다. 릭의 자질구레한 잡동사니 수만큼 그를 쉬이 여겼던 만큼, 번듯한 미소를 짓는 루시엔에게 선을 그었다. 그가 제 호텔룸 이웃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의아한 사실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알게 된 사람 중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구석진 곳에 배정되지 않는 게 적절할 텐데……. 명실상부 고귀한 호텔 판도라의 객실 배정 기준에 그런 것 따위가 고려될 리 없었다.

  거리를 재어 벌리는 것은 오히려 가장 손쉬운 일이었지만, 한 가지 불편한 구석은 그럴 때마다 그의 말이 들어맞는 일이 하나씩 생긴다는 점이었다. 싱거운 얼굴로 유리정원에 따라가 장미를 받고서 핀잔을 줬지만 결국 술래잡기가 메리의 발을 넓히기에 적절했다는 것이나, 지금 메리가 다수의 사람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동행을 제안하는 것마저. 사색의 결과인데도 에그타르트의 필링을 나중에 먹는 원리에 긍정하는 것과 같았다.

 

  있다가 없을 수도 있고 없다가 생길 수도 있는 게 거리감이죠. 굳이 각잡고 정의내려 봤자 이 이상한 호텔에서 어떻게 바뀔지 내일 일도 알 수 없답니다, 부인.

  그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구려. 특히 그쪽과는.

 

  매 판단은 최선의 선택이라고 새기며 살았기에 루시엔과의 동행은 마사에게 올바른 제안이었다. 루시엔이 먼저 방을 나서는 마사의 걸음새를 살피는 동안 마사는 루시엔을 짧게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싫어하는 것도 불편한 것도 이쪽인데 왜 사과를 고민하는 것도 자신이어야 하는지, 더군다나 아는 것이라고는 출신 뿐인 신사는 이 마음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길 터였다.

  세 사람은 모퉁이를 한 번 꺾어 문 안쪽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걸었다. 아무리 체격이 좋다 해도 손수건으로 동여맨 루시엔의 왼손과 오래 걸었을 루카스의 다리를 보아 건장한 시종 하나만 달려와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었다. 마사는 메리에 집중하며 루시엔을 지워냈다. 그는 이상하게 책임감 있는 한량이니, 맡겨두고서……. 이미 훤히 나 있는 길로 걷자고.

  마사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루시엔의 신조에 한 번 더 동의했다.

 

 

 

 

10.

 

  루시엔과 헤어질 만큼 걷고 상처가 벌어지더라도 마사는 조금도 다치지 않은 것처럼 움직였다. 고통을 감내하는 일이야말로 마사의 몫이었고, 전역 이후로 늘 그렇게 했다. 술 기운이 있으면 고통을 덜어 괜찮았다. 속도라면 원래 느려 차이날 것도 없다. 그 습관을 특별히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도, 루카스가 제 옷차림을 훑을 때 안심을 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루카스와 마사는 흙먼지 대신 피를 뒤집어쓴 몰골이었다.

  루카스는 별 말 없이 자신을 따라와주었다. 한 훈련생으로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마사는 유리지붕 근처의 좁은 틈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슬금 루카스의 뒷모습을 살폈다. 그는 메리를 찾는 데 열중하며 짜증을 삼키고 있었다. 루카스는 환풍구에서도 짓씹은 숨을 내뱉을 뿐 조용히 처신했지만, 마사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루카스는 이곳에서 마사를 마주친 순간부터 호프먼 대위를 의식하게 되었다.

  두 번째 만남이 나빴으므로 어떠한 관성이나 원리가 그를 이끌었는지 모른다. 첫 재회에서 그는 마사의 부상 소식에 무릎이 내려앉았지만, 마사는 벽을 세워 루카스를 일으킬 뿐 해명하지 못했다. 총기 사고로 물러난 헬런드 가의 차남이 망나니라며 군에서 도는 저급한 소문을 막을 길이 없어, 마사는 그 소문으로 루카스의 소식을 접해보자고 위안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건실한 만큼 절망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하지만 그의 본성까지 악할 수는 없다고 막연하게 믿은 채로 지냈다. 하지만 루카스는 마사가 소문으로 옛 제자의 근황을 접하리라고 생각치 못했는지 마사를 피하며 다녔다.

  아니, 이제는 옅게나마 알 수 있다. 호텔에 와서 좋은 일이 생긴 적은 없지만 생사를 오가는 상황에서 지켜야 할 도리란 접착제와도 같았다. 루카스가 아무리 피하고 싶다 한들 상대를 죽게 내버려둘 정도로 물러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마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을 딛고 올라갈 재능을 가진 군인이었고, 그에 죄책감을 안고 있는 만큼 그가 이곳에서 다치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하물며 시종에게라면 더욱. 무슨 이유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는지 물어본 적은 없지만, 리처드와 릴리 사이의 가문 내 위치를 생각하면 결코 순수한 휴양은 아니었다. 인기척이 느껴져 검지를 입술에 얹고 루카스에게 눈치를 주었다가, 다시 풀벌레 소리도 사라진 정원에서 두 사람은 걸어나갔다.

 

  “자네는 여기서 나가면 무엇을 할 생각인가?”

  “……딱히 생각한 건 없습니다. 평소랑 다를 바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대위님은요?”

  “잘 모르오,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그래서 자네가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지 물은 거요.”

 

  마사는 무던히 루카스와 자신을 갈라 놓으며 기대 없는 말을 남겼다. 그에 알 수 없는 반발심이 생겼는지, 미래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말하던 그가 태도를 바꿨다.

 

  “그러면 궁금한데, 반대로 대위님은 왜 이렇게 열심히 움직이시는 겁니까?”

  “아직 잘 감이 안 오나 본데, 자네가 나를 데려온 걸세.”

  “……방금 하나 생겼네요. 대위님을 멀쩡하게 영국까지 데려다 두는 거요.”

 

  삶을 이어가고픈 마음이 없을 때 마사를 토끼굴의 아래로 떠밀어준 건 비밀통로의 위치를 가리키는 당연한 한마디였다. 길이 있기 때문에 벗어나야 한다. 이대로 멈춰 죽을 순 없으니까……. 루카스의 그 말이 마사를 살렸다. 루카스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앞장서자, 마사는 메마른 울음을 억누르기 위해 작은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그래봤자 땅을 보고 내리쉬는 한숨에 섞여 있어 웃음소리조차 산산이 흩어졌다.

 

  “내가 영국의 어디에 사는 줄 알고. 그래, 같이 도착한 다음에는?”

  “거기부턴 대위님이 정하십시요.”

  “앞으로 또 뭘 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뭐, 그렇죠. 하릴없는 백작가 차남 삶이 얼마나 할 게 있다고…….”

 

  지팡이를 짚는 손에 힘이 들어가 마사는 루카스의 말끝을 대신 맺어주지 않고 보폭을 맞췄다. 쉴새없이 떠돌아 고이지 못했던 삶을 판도라의 상자 아래에 못 박을 순 없어, 마사는 헬런드 가의 저택을 떠올렸다. 도로시가 지내는 건넛마을의 여관도. 바다는 여전히 두려워도 천칭에는 사람의 무게가 실렸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잠시 같이 다니지. 헬런드 가와 다를 테니.”

  “같이 영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면요.”

 

  그 답을 듣기까지 오랜 침묵이 걸렸다. 그동안 시선은 루카스의 뒤, 즉 앞을 향해 두었다. 십오 년 전 마사는 루카스의 정수리나 과녘만 내려다보았으므로 습관이라고 해도 좋았다. 만나기로 한 너머의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나자 가슴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해졌다. 

 

  “안 되면 말고.”

 

  이 바람마저 신이 외면한다면 비로소 짐을 내려두어도 좋겠다고, 마사는 유목을 연장한다.

 

 

 

 

11.

 

  What made me run away was doubtless not so much the fear of settling down, but of settling down permanently in something ugly.¹⁾

 

 

 

 

 

 

¹⁾ 알베르 카뮈, 후대의 인물이지만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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