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장례
2021. 6. 29.

 

 

  “마사, 우리 결혼하지 않겠나.”

  “결혼하면 뭐라도 달라지나?”

  “당신과 나. 그거면 충분하지.”

  “진심인가?”

  “진심으로.”

 

  결심을 맺고 나니 결혼식은 조촐하고도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하객도 없이 늦은 새벽 무기고 옆의 작은 창고에서 진행되었다. 주례는 돌아가며 맡았다. R은 꼭 결혼해본 적 있는 사람처럼 가슴까지 쌓인 짐더미 뒤로 가더니 어디서 들어봤을 법한 교회의 예식 절차를 우스꽝스럽게 흉내냈다. 마사는 긴가민가 하는 얼굴로 R이 시키는 대로 읊었다. 부케 대신 하잘 것 없는 들풀, 음식은 전날 먹고 남은 빵 몇 조각. 초라한 예식장에서도 R은 진지해보였다. 

 

  “신부, 마사 호프먼은 ───를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자네 먼저 함세.”

  “당신은 걱정이 많아.”

  “당신은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고.” 그렇게 말하던 마사가 빙글 돌아 R의 옆에 섰다. “───, 마사 호프먼을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R은 망설임 없는 대답을 뱉고 마사의 가늘어진 시선을 받았다. 그러나 금세 마사의 어깨를 잡은 뒤 연단의 앞으로 되돌려놓았다. 마사는 마주 맹세하는 대신 목을 긁적이다 질문했다.

 

  “당신의 무엇이 달라진단 말이오?”

  “맹세만으로 부족한 신부가 세상에 있었군. 마음가짐 말이야. 당신과 나를 엮는 공식적인 고리 아닌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거요.”

  “공식은 주례가 선포하는 게야. 당신이 싫어하던 게 규율이면서 이럴 때에만 들먹이나? 섭섭하네, 서운해.”

  “…….”

 

  나무판자 틈새로 들어오는 달빛이 겨우 창고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아껴둔 촛불 하나에 의지한 식장에서는 두 주인공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마사는 R이 깊어진 눈으로 불안과 슬픔을 삼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엉성한 연단과 십자가를 뒤로 하고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림자는 마사를 안았다. 빳빳한 옷깃 아래로 온기가 따스했고, R은 그대로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우리는 쏟아낼 곳이 필요하잖나. 함께 기도함세.”

 

  맹세를 얻어낸 그는 품에서 단도를 꺼내더니 자신의 약지 아랫마디를 그어내렸다. 반지가 들어갈 자리에 피가 흘렀다. 마사는 앞으로도 찰 수 없을 증표를 상상하는 대신 제 왼손도 내밀었다. R은 마사의 아내가 되었다.

 

 

 

 

 

 

  마사는 진작에 자신이 중장의 자리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입밖으로 내지 않았는데, 전쟁에 참전하면서는 그 골이 깊어졌다. 세 번째로 지시한 작전이 한 사람에 의해 반려되었을 때에는 R조차 위로할 수 없는 패배감이 몰려왔다. R은 마사의 손을 이마에 대고 눈을 감아 애정을 전하곤 했지만 전사에 전전긍긍하는 상황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마사는 오랫동안 상사에게 진급을 방해 받았고, 그 자가 R을 가까이 두고 있음을 알게 된 순간 겨우 쌓아둔 둑마저 허물어 무너졌다. 호프먼 대위는 그 길로 총을 숨기고 천막을 찾아가 방아쇠를 당겼다.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발로 드높은 지휘관 대신 그 곁에 있던 아내의 심장에 바람구멍이 들었다.

  바깥의 경비병이 두 팔을 붙드는 동안 마사는 남은 두 발을 자신에게 겨누었다. 뒤늦게 손가락을 달싹여도 이미 방향은 목이나 이마가 아닌 다리와 배로 엇나간 탓에 탄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생을 마감하기에는 스스로 겨눈 탄환을 빗맞출 정도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마사는 흠씬 두들겨 맞고 정신을 잃었다.

 

  함께 기도함세.

  자리에 앉아 가만히 있어도 좋소. 내가 대신 기도하리다. 믿는 자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소.

 

  존 델가도의 흥건한 살덩이를 업고 경보하는 동안 등으로 눅진하게 피가 배어들었다. 기도를 나누려 한 그에게 조금의 동정도 안타까움도 없었다. 그 대신 무관심한 의심을 내어주었을 뿐이며, 마사는 그의 죽음에 어떠한 무게를 가져갈 의무감을 받지 못했다. 한 사람의 입김은 지나치게 연약하다. 그러나 마사가 공자비가 든 신부의 눈과 마주쳤을 때, 그는 신부가 무어라 말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R이 자신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 그래서 그 입을 직접 틀어막고 싶었다. 그저 공자비의 손아귀에서 도망치면 충분한데도 감행하는 것은 엄연한 광증이었다.

  5층을 순회하며 겨우 좇던 메리가 결국 볼링레인 너머로 사라진 뒤, 마사는 사람들을 확인하기 위해 538호로 돌아가는 대신 대연회실로 향했다. 완전히 아물지 않은 뺨의 상처를 감싸는 대신 저물어가는 노을빛에 기대 내부의 동태를 살폈다. 공자비의 발 아래는 사형수들로 가득했다. 그의 시종인지 투숙객인지 알아볼 수 없을 산이었다. 그 안에서 델가도의 시신을 찾아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등을 붙이고 수단을 입고 풍채가 좋은 신부는 특징적이라 해도 피범벅의 더미를 가늠하긴 어려웠고, 그를 찾는 사람이 마사였다. 그래도 마사는 신중을 기해 분투하던 사람들 새로 몸을 옹송그리고 신부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시체 더미를 흉내내는 일은 무엇보다도 쉬웠다. 마사는 대연회장의 뒤편에 델가도의 몸을 앉혀두고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시종의 비명에 알리체 공자비는 마사를 알아보았다. 마사를 발견한 공자비의 눈이 번들거렸으니 적어도 마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행히 마사는 시신을 둔 535호를 벗어나 반대편 입구에 있었고, 알리체는 아직 델가도의 머리만 남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연연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죄를 고하러 왔느냐?”

  “비슷하오. 속죄해야 할 사람이 많아서.”

  “그 자들이 이 아래에도 깔려있겠구나. 다 네가 짓밟은 목숨이니.”

  “부정할 수는 없겠소. 헌데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오? 보필하는 자가 없었다면 진작에 죽었겠지.”

  “그건 그들의 의무이니라.”

  “이 또한 내 의무요.”

  “감히 경멸하는 눈빛으로 본 자가 자신은 고결하리라 믿느냐? 외로움에 골몰한 자가! 우습기 짝이 없구나.”

  “……내가 외로워 보인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이 가장 많을 다과회장에 찾아왔을 리 있나. 그것도 모르다니, 아둔한 자가 따로 없어.”

  “아…….”

  “그래! 너는 이곳에 남거라. 네가 얼마나 미련한 사람인지 친히 가르쳐줄 테니.” 

 

  알리체가 찢어질 듯 웃어제꼈다. 타오르는 석양 아래 알리체의 붉은 머리칼이 분간이 되지 않았다. 온 하늘이 그의 것이고 델가도의 머리는 그 주위에서 맴도는 수성이었다. 마사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기도하겠네. 파드득 정신을 떨쳐내고 옆의 테이블을 쥐었다. 왼발에 힘을 실어 몸을 돌리자 알리체의 손짓에 달려오는 시종들이 테이블에 걸렸다. 그대로 무더기를 밀치고, 뒤의 의자를 발로 걷어차자 어린 시종 하나가 태양의 방향으로 넘어졌다. 알리체는 순간 머리카락 몇 올을 남기고 왕홀을 놓쳤다. 다른 시종이 손을 뻗어 데구르르 굴러가는 델가도를 잡으려고 했지만, 마사가 촛대를 집어던지며 잿빛 머리칼을 제대로 차지했다.

 

  “아!”

 

  광기로 점철된 알리체가 고기칼을 신경질적으로 휘두르자 오른팔에서 배까지 깊게 베여나갔다. 통증보다 흥분에 시달릴 가엾은 알리체, 델가도는 조금도 당신을 위해 기도하지 못할 텐데……. 피가 울컥 소매를 적시기 시작했다. 마사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지팡이를 줍고 신부와 함께 뛰었다.

  정신을 차린 건 387호실에서였다. 사람도 동물이라 귀소본능이 있다고, 하물며 헤아리지 못할 기간을 지낸 객실 하나일지라도 마사는 등에 델가도의 몸을, 손에는 머리를 들고 통로를 누비다 원점에 닿았다. 마사는 소파에 신부를 맞추어 뉘인 다음 욕조에 물을 받았다. 아벨과 카미유가 앉았던 소파였지만 지금은 죽음의 자리였다. 그들이 앉아도 그랬겠고.

  잠자코 물소리에 넋을 놓느라 문밖의 동태를 잊은 마사는 거의 다 사라진 노을마저 커튼을 쳐 기색을 물렸다. 이불을 매달아 벽면에 달린 거울을 덮자, 델가도의 영혼이 말했다. ‘하마터면 눕지 못하고 저 안에서 당신을 봤겠군, 고맙소.’ 마사는 안에 담근 수건 한 장을 가져와 그의 눈두덩이부터 천천히 닦아주었다. 교리를 미워한다기에는 묘하게 집착적이고 정성스러웠다. 이미 붓기가 오른 델가도의 곱은 손가락을 펴고, 단추를 푸는 대신 깃을 반듯하게 다듬어 머리를 맞췄다. 침대로 옮겨 낮은 베개를 받치자 고르지 않은 살결의 단면이 가려진 델가도는 얼굴 근육이 뒤틀린 것 말고는 조용히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름진 흰 시트를 반듯하게 펴고 티테이블의 화병을 돌아보았다. 백합 대신 노란 장미였다. 루시엔이 말하길, 노란 장미는 우정과 기쁨이라 했다. 후자는 몰라도 전자는 맞았다, 이미 마사는 신부가 아닌 다른 이에게 기도하고 있었으니까. 애도할 장소가 초라하고 추모객이 없는 것도 완벽했다. 그는 신부의 손을 엮어 장미를 들려주었다. 시신을 내려다보는 얼굴에 회환과 미련이 일렁이다가, 마사는 작은 신부를 따라하듯 곁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공식적인 델가도 신부와 마사의 연관성은 처형에 동의한 것 말고는 없었다. ─과 마사도 그랬다. 마사가 델가도에게 얼굴을 묻자 그가 말했다. 내가 대신 기도하리다.

 

  In nomine Patris, et Filii, et Spiritus Sancti…….

 

  마사가 답했다.

 

  “당신한테 이렇게 해주고 싶었소.”

 

  Amen.

 

  그제야 기도가 잠잠해지고 많은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마사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고, 맥박이 생동했지만 비로소 나아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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