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감은 곧 부유로 번진다. 마사는 실의에 빠진 이후로 웬만한 일에 곧장 무던해졌는데, 무엇을 하든 전보다는 나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헤집어놓은 상처 이상으로 선을 넘을 리가 없었다. 마사는 죽음에 수더분한 만큼 그 이상의 충격에는 방심했다. 카를 막시밀리안의 죽음보다 잃은 기억을 되찾은 것에 타격을 받았듯.
그래서 마사는 알리체 대공비를 대면하고도 태평하게 응수하려 들었다. 윗사람의 처소에 발을 들인 적은 거진 칠 년만이었지만, 그 당시의 면담은 실패로 돌아갔으니 긴장할 것도 없었다. 그 일은 그 일이고, 이번 건 무관하다. 그는 위에서 식탁보를 쓰고 기다릴 주세페를 생각하며 그렇게 다짐했다.
“마일즈 스트릭랜드의 옛 동료. 81st North Lancashire Regiment, 마사 호프먼 중위입니다. 그 자와는 운 좋게 베네치아에서 마주쳤었지요. 다시 한 번 여쭙습니다. 실로 제게 하실 말씀이 없습니까?”
“호텔에 묵지도 않는 자의 이름따위. 절대로, 들어본 적 없다 하였다. 감히 나를 희롱하는 게야!”
마사를 흘겨보던 공자비는 당연하게도 그가 초를 갈아주겠다는 직원 행세를 하여 금기의 영역에 다다랐음을 간파했다. 마일즈의 얼굴도 희미한 마사는 거짓을 말한 덕에 알리체의 전언에 담긴 말뜻을 읽어냈지만, 그 이상은 예상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방향으로 들이닥쳤다. 알리체가 협탁 위에 놓인 와인잔을 쥐어 마사의 얼굴에 거세게 던졌다. 쨍그랑! 귓가 뒤의 벽에 부딪혀 깨진 조각이 뺨을 긋고 바닥에 뒹굴었다.
마사는 제 얼굴에 피가 흐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르는 하트 퀸의 아래 겨우 머리를 숙이고 맨손으로 조각을 주웠다. 몇 번의 호통이 이어졌지만 되려 그 불호령이 윤곽을 드러내고 안개를 걷어내게 했다. 알리체 아우구스타는 사실을 부인하기 위해 미쳐버렸다. 알리체가 일어나 보석함을 집어들자, 찰그락거리며 쟁반에 조각을 모두 갈무리한 마사는 머리가 찧이기 전에 문가로 물러났다.
“전하, 피는 언젠가 멈추지만 말의 꼬리는 발에 밟히도록 긴 법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등 뒤의 문을 닫자마자 묵직한 무게가 둔탁하게 내리꽂혔다. 마사는 진동을 피해 주저앉을 뻔했다. 촛불로 밝힌 방에서 막 나온 탓에 시야가 어지럽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피가 턱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목이 뚝 꺾인 붉은 장미 줄기를 그려보고 겨우 문가에 세워둔 지팡이를 찾으러 허둥거렸다.
마사는 허리를 세우고 곧게 걸어다니면서도 지팡이를 놓지 않았는데, 예외가 있다면 자신을 숨기거나 무시 당하지 말아야 할 동행인이 있을 경우였다. 대공비에게는 그럴 듯한 직원의 걸음걸이를 위장해야 했으니 전자였고, 지팡이를 바깥에 두었다. 헌데 알리체에게 불을 붙여주고 나오니 바깥이 새카맣게 분간이 가지 않았다. 가지고 온 양초는 모두 방 안에 두어 어둠에 적응하려면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일을 겪고 나온 마사에게는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있어야 할 자리를 더듬거려도 빈손만 쥐여졌다. 아린 통증에 심장이 내려앉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지체할 틈이 도저히 나지 않았다.
대공비의 절규로 확증을 얻어 술렁거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던 마사는 결국 화를 불러일으켰다. 대체 어디로 간 거지? 혼잣말을 하며 제자리에서 맴돌던 나머지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사내에게 발을 걸고 만 것이다. 쨍그랑! 장신의 남자 대신 마사가 넘어져 바닥에 무릎을 찧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쟁반에 받쳐 나온 유리 조각이 바닥에 한 번 더 굴러 산산이 부서져 남자에게도 충분히 튀었다.
“……음.”
“……하.”
신음을 뱉은 마사가 자리에 주저앉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한 손을 털며 엉덩이를 뒤로 끌자 비로소 달빛에 반사되어 조금씩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태껏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헤매고 있었던가. 남자는 용케도 불을 들고 있었고, 원인은 빛 없이 다니던 이쪽이 제공했다. 하기사 넘어지고 싶은 자가 아닌 이상 맨눈으로 다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상대편도 여기에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정신이 든 마사가 소매로 뺨을 문지르고 한 손을 길게 뻗자 남자가 먼저 나뒹굴던 쟁반을 주워 내밀었다.
“괜찮으신가요?”
“나는… 됐소.”
쟁반을 받아들고 나뒹굴던 조각을 주우려던 손을 남자가 조심스럽게 가로막았다. 마사는 자신을 감싼 손가락에 멍울지는 피를 보았다.
“그건 차라리 비질을 하는 게 낫겠어요.”
“……가만, 자네 손에도 피가 나는데.”
마사가 몸을 돌려 얇고 긴 손가락을 쥐고 뒤집어보았다. 마디에 얇게 긁힌 틈으로 핏방울이 새고 있었다. 마사는 손을 응시하다 동시에 시선을 맞추는 남자의 태도가 불편해 옷을 털고 일어났다. 파편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지자 한 걸음 물러선 로저는 난간에 촛대를 내려놓고 제 뺨을 두드렸다.
“마찬가지로요.”
“이건 방금 생긴 상처가 아니오. 안에서 생겼지.”
“안에서 다쳤으면 덜 아픈가요?”
로저가 바로 앞의 객실에 적힌 호수를 확인했다. 마사는 모른 척 발로 유리를 쓸어모으려 했지만 청년에게로 자꾸 눈길이 갔다. 남자는 제 손으로 피를 흘리게 한 부상자였다. 그리고 마사는 절벽에 떨어져 죽은 사람들에게 애도는 표하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선마저 모른 척 지나치지는 못했다. 가벼운 상흔이라고 하나 책임의 소유가 분명했다. 마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속으로 꼬마 유령들에게 허락을 구했다.
“미안하게 되었소. 자네 손부터 치료함세.”
“사과를 받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호의는 감사히 받을게요. 부인도 상처를 그대로 놔두면 안 될 것 같고요.”
마사는 순순히 벽의 모서리에 쓰러져 있던 지팡이를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로저는 유리잔을 버리는 것을 거들었고, 두 사람은 카미유의 손을 꿰맨 이후 봐두었던 의료 시설로 향했다. 호텔의 좋은 향이 나도록 둔 니콜로의 조치가 적절했는지 의료실에 들어서도 미약한 소독약 냄새가 덜했다. 마사는 간호병 시절과 사뭇 다른 분위기에 감탄했다.
커튼을 찢어주었던 카미유보다는 상황이 훨씬 나았다. 그는 손이 찢어졌고 이쪽은 베였으니까. 마사는 허술하게 복도를 서성이던 것과 달리 손재주가 있었다. 먼저 간지러운 제 뺨을 닦아낸 다음,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로저의 손가락을 두드려 씻어냈다. 청년은 친절했지만 적극적이지 않았고, 사색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마사의 주된 일이었지만 지금은 묘하게 견디기 어려웠다.
“왜 거기에 있었나?”
“호텔을 둘러보던 중이었어요. 뭐라도 상황을 파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고 이 밤중에 뭔갈 찾긴 어려울 텐데.”
“그런 것 치고는 이렇게 부인을 만나뵈었으니 아닐 지도요.”
“…….”
“수확은 있었나요?”
“그 대신 피를 봤지. 대공비께선 상냥하진 않더군.”
팔꿈치를 다리에 대고 구부정하게 앉은 나머지 이마로 넘어온 잔머리가 다시 주름진 손에 쓸려 넘어갔다. 마사는 어림짐작으로 얇은 면보를 찾으려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몸을 돌렸다. 두꺼운 붕대가 마뜩찮아 가위로 천을 잘라낸 다음 손바닥을 내밀었다. 로저가 왼손을 얹었다.
“자세히 알고 싶소?”
“모르고 죽는 것보다는 알고 다치는 게 나을 테니까요.”
물빛 눈이 바르게 마사를 향하자, 마사는 마음의 짐을 덜어내려 천을 감아주기로 결정했으면서도 더불어 변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자네는 딘 쉘튼의 망령을 알고 있나?”
“아… 전하께서 환각으로 동일한 인상착의를 보셨다고 했죠?”
“그래. 그 점이 이상해서 짚고 넘어가려 한 거요.”
“의외였긴 하죠. 그렇다 해도 연관점이 마땅하지 않아서 애매했는데… 접근법이 궁금하네요.”
“내 아는 바로는 가장 큰 두려움은 곧 앎에서 기반한다오.”
“철학적이군요?”
“그런가. 예를 들면, 바퀴벌레를 많이 잡아본 사람이 날갯짓을 상상하기 쉬운 게지.”
물갈퀴로 패일 안쪽부터 감아나가 중간 마디에 다다를 즈음 마사는 허리를 폈다. 로저는 그새 마사의 뺨을 타고 배어나오는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마사는 화들짝 놀랐다가 로저의 웃음에 미간을 찡그렸다.
“피가 나서요.”
“신경쓰지 마시오.”
“하하, 똑같은 셈 치죠.”
로저가 손을 내리자 마사는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결론은, 물리력을 행사하는 얼굴이 왜 하필 그 무뢰배였겠소? 같은 향을 마셨으니 공자비도 원리에서 어긋나지는 않겠지. 표본이 적긴 해도 예 묵는 사람들은 죄 비슷한 유형으로 묶을 수 있었으니, 공자비를 예외라고 치부하기보다는 우리가 모르는 진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요.”
“음, 그 논리에 따르면 딘 쉘튼과 공자 부부가 아예 무관하지는 않을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여쭈셨습니까?”
“그렇게 되었군.”
“아하… 해답은 얻으셨고요?”
“어느 정도는. 자네만 예상 반경에 없던 것 말고는 충분히 가늠한 일이었네.”
마사는 말을 끝맺고 손을 되돌려주었다. 남자가 헐겁게 칭칭 감긴 검지를 돌려가며 보자, 마사는 남은 천 조각들을 돌돌 뭉쳐 손에 쥐여주고 유리에 베인 상처는 세게 묶지 않길 당부했다. 로저는 적법한 치료에 마사를 보고 으쓱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내가 벌여놓은 일이라 할 말이 없군.”
“그래도 결국 이렇게 해주셨으니까요. 다시 원점이네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앞으로는 깔끔하게 못 본 척 잊어주게. 빚은 쌓일수록 사양이니 말일세.”
자리를 정돈하며 증류수가 담긴 작은 병과 붕대, 천을 주머니에 깊숙이 쑤셔넣자 로저도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덧 삼십 분이 지나 있었다. 더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지만, 어린 아이에게 그대로 피를 내보일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던 일이었다. 묵묵히 스스로를 변명하는 동안, 로저는 문가에 서서 마사를 기다렸다. 그리고 의외의 질문을 했다.
“이미 되갚은 채무여도 두려워질 만한가요.”
마사는 의자를 밀어넣고 힐긋 돌아보았다. 로저가 마사를 치료해주는 반대의 상황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엮이는 것은 사양이었다. 마사는 그와 물 흐르듯 대화를 나누고도 과거의 경험에 덧대 부정했다.
“안다는 건 그런 법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