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는 예술과 한참 다른 길을 걸어왔다. 스물이 되기 전에는 책을 조금 읽었던 것도 같지만, 마사의 기민한 기억력은 한참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그는 화장실 변기에 뒤로 고꾸라져 있었던 딘 쉘튼의 오른팔이 위로 들려 있다는 건 기억해도 열세 살에 불러보았던 성가의 가사는 좀처럼 떠올릴 수 없었다. 마사에게 아름다움이란 한 번 국경을 넘으며 바다에 버려진, 하등 가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이 땅을 고르고 악마가 진흙으로 빚은 호텔 판도라는 마치 사탄의 신전과도 같았다. 견식이 좁은 마사는 그 그릇된 풍요가 정확히 어떤 원리로 쌓아올려진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도 눈부시게 기울어진 차양이 얼굴에 그림자를 덮자 이 그늘 아래 쉽사리 떠나갈 사람은 없으리라 실감했다.
누군가에게는 영감이, 누군가에게는 낙원과도 같은 휴식이 될 호텔에 마사는 섣불리 발을 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어린 청년 하나를 대동할 것을, 하고 후회한다. 마사가 아는 랄프는 어디든 돌아다니며 세상을 보길 좋아하는 시골 소년이었다. 밀밭이 춤을 추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캔버스를 꿈꾸는 아이. 낙원이라 불리는 상자를 여는 것도 견문을 넓히기에 도움이 되었겠지만, 제 돈으로 등을 떠민 학업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마사는 그 랄프 그린우드를 대신하여 여행길에 오른 사람들 사이로 섞여든다. 이름을 대고 387호실을 배정 받았다. 친절히 짐을 들어주겠다는 버틀러를 사양하고서 총지배인 니콜로 키엘리니를 따랐다. 그는 정중히 열차에서의 일을 사과하며 저녁 만찬을 설명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소.”
열쇠 뭉치를 베스트 주머니에 넣던 총지배인이 마사에게로 시선을 들었다. 호텔에 막 도착한 손님은 창 너머로 보이는 화려한 풍경보다 열차 안의 사건에 주의를 기울인다. 미소 지은 채 눈썹을 치켜올리는 직원에게 까칠한 물음이 떨어졌다.
“그 범인은 어떻게 되었나?”
“호텔 판도라 측에서는 손님의 안전에 최선을 다하겠다 약속 드리겠습니다. 조금 뒤 만찬에서…”
정중하게 호텔의 사정을 설명하려는 그의 말문이 가로막힌다.
“지금까지 정작 내가 알아야 할 이야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군. 소문이 와전되면 명성에 금이 가는 건 호텔일 터인데.”
“…….”
“사람이 죽은 일이오.”
확실히 하는 게 좋을 거요. 노인은 매섭게 쏘아보고서 대화를 끊어냈다. 마사는 손해를 배상할 방도가 아니라 사건의 경위가 궁금했다. 그러나 호텔 로비에서도 돌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몸수색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호화로운 음식은 마뜩잖은 기억에 두터운 벽을 발라두려는 의도였다. 호텔 측은 그 벽 안이 비어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간과했다. 마사는 당장 그 지배인 하나를 붙들고 늘어져봤자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잘 알기에 단숨에 문을 닫았다. 티끌 하나 없는 복도에는 정적이 일었다가 구두 소리가 멀어진다.
단절된 너머를 내다본 노인은 트렁크를 내던지듯 내려두었다. 창문을 열자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솔솔 불어들어온다. 방금까지 누군가를 꾸짖었던 분노는 조금씩 사그라든다. 그도 그런 게, 마사는 딘 쉘튼의 부고를 접하고도 태평하게 술잔을 기울였다. 어찌 되었든 제 목숨은 붙어있었으니까. 그의 아버지는 천성이 엄격한 인물은 아니었으나 열일곱 살의 마사에게 동승자를 멀리하는 법을 가르쳤다. 여기서 우리는 한 번 죽는다. 다른 땅에 닿아야 비로소 태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숨죽여 기다려라. 이제 막 어른을 앞둔 딸아이는 처음에는 반항했고 나중에는 순종했다. 조금 더 나이를 먹고선 나라에 헌신하며 배로 국경을 넘어다녔던 경험이 쌓여 지금의 방관으로 다가왔다.
더군다나 원래 호텔 판도라의 명성 높은 이름에는 자연히 뒤따라오는 믿음이 자리한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승객들이 불쾌할 테니 범인을 잡겠다 약속하는 책임을 다하리라는 신뢰. 호텔의 처신은 갑갑하게도 제대로 부응하지 않았다. 같은 천장 아래 범인과 한 식탁을 두고 포크를 드는 상상은 유쾌하지 않다. 살인범이 덜미를 잡힐 새 없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또한. 승객들과 거리를 벌리는 버릇 때문에 그 칼날이 자신을 향해 벼려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홀로 휴가를 즐기고 돌아가리라는 다짐이 짓이겨지고 있었다. 마사는 이 점이 탐탁찮아 항의했지만 그렇다고 응당 누려야 할 것을 사양할 이유도 없었다.
시간을 확인하면 만찬이 시작되기까지 한 시간 남짓. 마사는 이 약속시간이 낯설었다. 기분 좋을 떄 잠들어 느즈막한 오후에 일어나는 습관은 그의 잠을 기약 없는 수면으로 바꿔놓았다. 그렇다면 지금 눈을 붙이면 식사는 물 건너 간다. 마사는 몰려오는 수마를 떨쳐내기로 했다.
니콜로의 전화가 한 발 늦었기 때문에 호텔에 진동하는 냄새는 여전했다. 마사는 향긋한 파이 냄새에 코를 킁킁거렸다. 참, 그 인간에게 바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봤어야 했는데. 오래 돌아다니며 기운을 허비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물어봐서 해결할 의지도 없다. 누운 자리에 돈이 쏟아지길 바라듯 두리번거리며 난간을 따라가자 턱을 질겅거리는 사내가 불쑥 튀어나왔다.
“마담, 찾고 계신 것이라도?”
하마터면 지팡이를 놓칠 뻔했다. 인기척도 없이 나타난 남자는 천연덕스럽게 눈썹을 늘어뜨린다. 사과의 뜻이었겠지만 조금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어디선가 들어본 것만 같은 목소리. 마사는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준다. 스스럼 없이 말을 걸기에 기억을 더듬어봐도 아는 얼굴이 아니다.
“도움을 청한 적은 없소.”
“이런, 그래도 난처하신 듯 하여.”
그렇다고 제 옷차림을 훑어내렸지만 털어갈 것 없이 허름하다. 그 교묘한 안색은 어둠 속에서 금색 눈을 빛내는 살쾡이처럼 재빠르고 정확하다. 카멜레온처럼 난간을 타고 흘러갈 인상에는 새카만 눈동자가 박혀 있다. 마사는 니콜로가 자신을 안내하기 전 홀에 울리던 남자의 걸걸한 목소리를 상기해냈다.
마사는 겉으로 부드러운 크림을 가장하면서 혀 아래에는 칼날을 감추는 영국식 화법에 익숙치 않다. 후미진 마을에서 벗어나 런던에 다다랐을 때 도무지 지나가는 이를 붙들고 길을 물을 수 없었을 정도로. 그에게 신사란 뜸을 들이느라 원하는 바를 좀처럼 꺼내놓지 않는 한심한 자요 반드시 제게 손해를 안겨줄 걸물이었다. 여기 위층에 계시는 공자님은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신다던데, 용케 참으셨군. 마사는 그 남자가 아이의 입지를 다지려 은근히 눈치를 주는 행동이 꼭 부유한 상인처럼 느껴졌다. 그러면 자신도 그의 앞에서는 동정 받아 마땅할 어린 아이로 놀림 받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콧수염을 매만지는 남자를 훑어보니 그저 한량이라 생각하기엔 말쑥하고 서재에 틀어박힐 법한 사내였다. 그리고 이 호의를 거절하기에는 너무나도 피곤했다. 검기에 도리어 투명한 눈동자 안에 자신을 비추던 마사는 느리게 답했다.
“식전주를 마시려고 하는데.”
“그 길이야 아주 잘 알고 말고.”
그러던 남자는 마사의 오랜 생각에도 따분한 기색 없이 껑충 돌아 마사의 옆에 섰다. 대가를 요구하려면 곧장 사양하겠다는 의지로 우로 세 뼘의 거리를 두었지만, 곧 계단을 오를 지 내려갈 지 알 길이 없어 붙박힌 셈이 된다. 안경을 치켜올리던 남자가 사람 좋게 웃었다.
“난 제시 위젠필드요. 세계를 떠돌지.”
“역시 자네가 맞았군. 처음에는 또 아는 사이인가 했는데.”
“여행지에서는 원래 사람을 많이 만나는 법인데. 이 편이 가는 길에도 즐겁지 않겠나?”
“내가 길 잃은 미아라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요.”
남자는 유쾌하게 미소짓더니 뒷짐을 지고 걸음을 옮겨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마사는 그 옆에서 반만 닮듯 한 주먹만 허리 뒤에 얹고서 느리게 따른다. 마사는 아래서 느껴지는 웅성거리는 기척에 진작에 조금만 더 걸어가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는 마사가 그러거나 말거나 예의는 있는 남자라 잠자코 기다렸다. 마사는 의도치 않았지만 그 기다림에 미약한 관심을 되돌려줬다. 원체 제게 말 걸 이유가 없는 사람들밖에 없던 탓이다.
“종일 여행만 다녔소?”
“글쎄, 가끔 소설은 쓰지요. 독자를 위해 쓴 적은 없어 출간은 할 일이 없고.”
“예술가의 영감이라는 겐가.”
“비슷하겠지. 추리 소설이니 조금 더 교묘하고 복잡하지만 말요.”
콧수염을 매만지는 위젠필드가 두 칸 건너 완전히 계단에서 떨어져 나왔다. 마사는 『주홍색 연구』를 모를 정도로 무지했지만 베네치아의 탑승객이었다.
“오는 길에도 그럴 듯한 사건이 터졌더군.”
“꼭 추리 소설의 도입부 같지 않던가? 홈즈가 등장하지 않은 것 말고는.”
“그래서 자네의 글에도 옮길 셈인가.”
“그렇다면?”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소. 어느 추리 소설가가 호텔에서 자네가 주검으로 발견된 걸 보고 영감을 얻어도 괜찮을 것 같은가.”
“아직 잘 살아 있소만.”
“예를 들면 말이오.”
“작가가 좀 유명한가?”
“그건 중요한 게 아닐세.”
“그렇다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마담은?”
그 질문에 달아오른 뺨을 긁적이던 소년을 떠올린다. 몇 년 전의 칠월. 마사, 베풀어주신 호의에 감사해서 무엇을 해드리면 좋을지 한참 고민했어요. 그런데 제가 가진 게 이것밖에 없더라고요. 그렇게 내려놓은 초상화 한 장과 이름 모를 들꽃 한 다발. 캔버스 안에는 꼿꼿하게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붉은 여성이 앉아있었다. 그 기저에는 용암과도 같은 의지가 깔린, 주인공을 잘 모르고서야 그릴 수 없는 그림이다. 마사는 숨을 쉬지 않는 자신에게 어쩐지 화가 났다. 그리고 주눅이 든 랄프에게 손가락 한마디만한 초상화를 다시 부탁하는 것으로 상황을 무마했다.
“불쾌할 수밖에. 그건 상대를 욕되게 하는 짓이지.”
“쉘튼 씨는 대단한 인격자더군.”
“하지만…….”
한 숙녀의 명예를 실추한 남자의 인권이야 거리에 굴러다니는 삼류 주간지보다 보잘 것 없다. 잘 모르는 이가 지면에 희롱범의 이야기를 옮기든 말든 관여할 이유도 없다. 마사는 순간의 변명 뒤로 붉은 자욱이 번지고 먼지바람이 일던 대지가 보여 인상을 찡그렸다.
“조금이라도 사견을 덧붙일 기회가 주어지지 않잖나.”
마사는 속죄하겠다는 고해를 믿지 않지만 선택할 여지조차 앗아가는 건 탐탁치 않았다. 물끄러미 안색을 들여다보던 위젠필드가 능숙하게 손뼉을 쳤다.
“지금까지 그 자를 글로 옮기겠다고 장담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새겨두지요.”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마사는 지금껏 깊게 생각한 만큼 무안해졌다.
“그거면 됐소.”
그리고 다시 침묵. 위젠필드가 몇 번의 위트 넘치는 농담을 하고 마사가 고개를 저었다. 말솜씨가 없는 마사에게 기름칠을 하는 듯한 재치는 단단히 잠겼던 입에서 이름은 물론 여행의 출발지까지 이끌어냈다. 모퉁이를 돌자 바의 훈훈한 기운이 훅 끼쳤고, 남자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런데, 늦었지만 불어가 더 편하셨었던가?”
“무슨?”
단정하고 희미한 인상의 뭉툭한 입꼬리가 찢어지듯 치켜올라갔다.
“분명 그런 것 같았는데.”
“그냥 영국 출신이오.”
마사는 그대로 고맙다는 인사를 잃어버리고서 왁자지껄한 인파 사이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남자는 바와 복도의 경계에 발을 걸치고 있다가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으쓱한 뒤 그림자를 감췄다.
슬슬 목이 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