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통행 동병상련
2021. 4. 22.

 

  남과 엮이는 건 피곤한 짓이다. 섬나라 교외에 살던 노년의 여성이 혈혈단신으로 국경을 건너 장화의 해안가에 도착하려면 기필코 새겨두어야 했던 사실이었다. 밑단이 튿어진 바지를 군화에 넣어 입은 허름한 옷차림에, 다 떨어져가는 트렁크 하나만 덜렁 든 여자는 누구에게나 만만해보였다. 마사가 잉글랜드 끝에서 출발하는 배에 몸을 싣고 갈 때, 마시던 술병에서 입을 떼면 내내 가방을 끌어안고는 말을 할 줄 모른다는 듯 매섭게 다물었다. 그는 취하고 싶었지 만만한 여자가 되기는 싫었다.
  머나먼 길에서는 항상 예외가 생기듯, 신경에 거슬리는 일은 비바 갈레타 섬에 도착하기 전까지 계속 솟아났다. 한 번은 북적이는 거리에서 번듯한 신사와 세게 부딪혔다. 두리번거리며 가게를 찾아 길을 건너다 일직선으로 건물을 따라가는 남자에게 들이박은 셈이었다. 가방 모서리에 찍힌 무릎이 쑤셔 한 번 돌아봤지만, 한 눈에 봐도 잘생긴 남자는 잘 다린 옷깃을 털자 예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마사는 낡은 트렁크가 벌어지자 물건이 쏟아질까봐, 솔직히 고하자면 귀찮아서 제대로 틈을 부여잡고 지나쳤다. 그런데 메시나의 가게까지 따라와 뜨거운 시선을 보내다니. 옷에 잉크를 쏟으면 세탁하기는 커녕 새로 살 법한 차림의 양반이 자신 같은 소시민에게서 사과를 받아내려 애쓰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 다음으로 시칠리아의 기차역, 사람들의 틈바구니로 순진한 여자를 희롱하던 무뢰배는 마음에 들지 않다 못해 질릴 지경이었다. 마사는 상관 앞에서 벌벌 떠는 쫄보들이야말로 여자의 엉덩이를 움켜쥐는 주범이라는 걸 알았다. 잉글랜드의 군인이란 죄 저런 인물 뿐인가. 노인은 들고 있던 지팡이로 느글거리는 작자의 머리를 내리찍는 상상을 했지만 금세 눈을 돌렸다. 다 해져가는 군화를 저 경박한 군인들이 본다면 구해주기는 커녕 가여운 아가씨에게 불을 붙일 게 뻔했다.
  마사는 이름을 호명하던 승무원 로렌자 옆에서 짐을 거들어주겠다는 마리오를 사양하지도 못했다. 객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까무룩 잠이 들었고, 몇 시간 뒤에야 주린 배를 움켜쥐고 일어나 와인을 주문했다. 차창 바깥으로는 붉고 노란 물감을 개어둔 노을이 졌다. 그간 견뎌온 며칠을 보상받듯 '베네치아'의 음식 서비스는 호화로웠다. 훈훈한 기운이 맴도는 열차 안, 깨끗한 침대 시트 위에서 먹고 마셔도 나무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기묘한 해방감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는 한 소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딘 쉘튼이 죽었다. 침 대신 오물을 삼키는 듯한 언행을 일삼는 남자의 이름을 그 시기에 알았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작은 화장실 칸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빽빽했다. 살인사건을 믿을 수 없어 고개를 내민 자들과, 소란이 피로해 승무원에게 항의하려 나온 자들이 섞여있다면 마사는 후자에 가까웠다. 마사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신 근처에서 지팡이를 딱, 딱 내려찍었다. 죽음은 달갑지 않았지만 전장에서 쌓인 시신의 산보다는 나았고, 숨통을 끊어놓은 범인은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깨가 무겁지 않았다.
  우글거리는 인파를 가로막는 승무원에게서 벗어나 객실로 걸었다. 문득 마사의 발치로 하얀 알약이 데구르르 굴러갔다. 열차가 덜컹거리며 한두 알이 모서리에 박히자, 마사는 지팡이 끝으로 약을 밀어낸 다음 다른 곳을 짚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동그란 알약 같이 작은 것을 놓치기는 쉽고, 온정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은 옆에서 도와줬겠지만 제대 이후 하루의 반을 누워서 보낸 게으른 노인은 그렇지 않았다. 근사한 식사를 마친 뒤 시신을 본 것도 역겨워서 더 기운을 빼고 싶지 않았다. 그때 차르르 약이 모조리 쏟아지는 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마사는 마일즈가 세우지 못한 이 열차에서 뛰어내려서라도 항의하고 싶어졌다.
  이윽고 가쁜 숨소리가 이어진다. 빳빳하게 고개가 돌아가자 문 안쪽 벽에 붙은 장신의 남자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열린 객실 틈은 손가락 두 개만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좁은데 신경안정제는 왜 그렇게 작아서 통로까지 쏟아져 나왔는지. 한참 전에는 전장에서, 그 이후로는 병동에서 아픔을 호소하는 환자들을 봐왔던 마사는 그 약의 복용 시기를 잘 알았다. 그리고 저 남자는…….
  괴로워하고 있다.

  기차의 바닥이 꺼지는 순간이었다.

 

 


 



  쏟아진 약과 다르게 고개를 숙인 남성은 잘 다듬어진 신부였다. 아래서부터 목끝까지 단추를 채웠을 수단이 그의 파리한 인상을 그대로 옮겨두었다. 지팡이를 짚고 문을 걷어차듯 들어가자마자 그가 쥐고 있던 은빛 십자가가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바닥에 구르는 병이 발에 채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바라보는 눈빛이 전등 아래서 혈흔을 닮았다.

  “이보시오.”
  “가셔도, 괜찮습니다.”
  “내 승무원을 불러드리리다.”
  그러자 조급한 손이 마사를 붙들었다가, 조금 뒤에 놓았다. 침묵한 후에야 다물린 입술이 벌어졌다.
  “정말로… 걸을 수 있습니다.”
  “난 자네 같은 작자를 잘 알지.” 

  말라가는 안색을 들킨 게 난처하다는 듯 예민한 낯빛을 하면서도 약 하나 삼키지 못하는 남자란 까다롭다. 마사는 흩어진 알약을 무시하려다가, 이번에는 밟지 않았다. 그 대신 벽에 기댄 그의 종아리를 지팡이로 누르고 등에 얹은 손에 힘을 줘 자리로 밀쳤다.
  남자는 미끄러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마사는 그에게 나무에 천을 덧댄 의자에 앉은 동료를 겹쳐보았다. 먹을 것을 나누고 약 한 알을 주머니에 아껴가며 괴로워하던 목걸이 속의 주인을. 의식적으로 둘러본 주변에는 깨진 화병이나 페이퍼 나이프 따위의 것들은 없었고, 마사는 한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였다. 이윽고 손 안에 들어가는 함이 딸려나왔다. 안에는 바닥에 굴러다닌 것과 같은 알약이 들어있었다. 허리를 숙여 약을 주워담으려는 신부의 구두코를 지팡이로 눌렀다. 

  “물을.”

  그 말에 상체가 들린 남자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한다. 마사는 테이블 위의 물잔을 발견했다. 약 한 알과 함께 쥐여주고, 눈짓했다. 신중한 남자의 굼뜬 행동에 마사는 자신이 여전히 간호사이고 눈앞의 신부가 환자인 풍경을 그리며 인내했다. 목울대가 들썩이고, 가쁜 호흡이 잠잠해지기까지 기다렸다가 잔을 앗아가 도로 밀어뒀다. 

  “한결 나아진 모양이로군.”
  “형제님 덕분이지요.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형제님이라.”
 
  형제님. 신부가 부를 호칭 중에서는 가장 평범했지만, 마사가 주목한 부분은 다른 곳에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악센트에 힘을 주었다. 뭉그러지는 소리는 분명 양쪽 다 프랑스의 것이다. 휘어지는 불어가 영어에 섞이는데 그 발음이 똑같다. 언어를 익힌 순서가 같다면 이상할 일도 없지만 타지에서 아는 얼굴을 마주친 것마냥 낯선 기분이 되었다. 마사는 저 먼 동쪽 대륙에서 유럽까지 건너왔을 남자의 배경을 떠올린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묻어가느라 안간힘을 쓴 마사의 꺾인 영광도 그려본다. 다시 신부가 정중히 성호를 긋듯 제 이름을 입에 올려 회상을 깨부쉈다.

  “예. 세례명은 아벨이라 합니다.”
  “마사 호프먼이오. 간호사 일을 했었지. 그래서 말인데, 그 약은 한 번에 그리 많이 처방받을 수는 없소.”
 
  마사는 승객으로 이 자리에 서 있었건만 환자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승무원을 마다하고 도움을 받았으면 응당 설명이 뒤따라와야 하는 법이며, 그냥 걸음을 돌리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은 알약을 줍기는 커녕 제 팔짱을 꼈다. 신부는 조용히 꺼낼 수 없는 말을 속으로만 읊는다. 간호사가 한 번 더 물었다.

  “누가 자네를 그리 만들었는지 궁금한데.”
  “그저… 열차 안에서 일어난 근래의 일을 복기했습니다.” 

  아, 이제야 알겠다. 누구도 죽음 아래 자유로워질 권리는 없다. 산자와 망자를 하늘이 비추는 길로 이끄는 성직자에게도. 신부는 삶을 끝맺은 광경을 목격한 누군가를 위로했겠지만 자신을 보듬어줄 상대는 신경안정제밖에 없었을 것이다. 생각이 극단까지 닿자 도리어 김이 식어서, 마사는 그제서야 이삭을 줍듯 알약 하나를 주워담았다. 아벨이 옆에서 거들었다. 병 안에 내용물이 반쯤 찼다. 카페트가 있어 버릴 필요는 없었다. 남은 반은 마사의 손에 들렸다.

  “나는 누구에게도 위로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오. 자네와 다르게 신실하지도 못해서 어떻게 살든 내 간섭할 바는 안 되지만.”
  “…….” 
  “한계는 생길 거요.” 

  손에 쥐여진 알약을 남자가 든 병 안에 털어넣으려다가, 아까의 상자를 열어 그 안에 담고 물잔 옆에 내려두었다. 아벨의 속눈썹이 들어올려진다. 어차피 꿋꿋이 사양했는데도 옷가지에 멋대로 찔러넣은 쿠르트의 만행이었으니 기회가 생긴 참에 짐을 덜어두는 편이 좋았다.

  “앞으로는 쏟지 않게 잘 간수하시오.” 

  다음에 이어질 신부의 항변을 듣지 않은 채 문이 닫혔다. 기도 드릴 줄 모르는 불경한 노인이 신부에게서 받을 수 있는 답례란 없었다. 혈색이 되돌아온 얼굴을 확인했고, 약을 돌려주었고, 더불어 조언도 했다. 이 정도면 되었다. 뒤탈은 없겠지.
  그 여지 없는 말이 언젠가 신부에게서 첫 고해를 끄집어낼 수 있을 줄은 모르고, 마사는 객실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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