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
2021. 9. 24.

 

 

판도라의 상자

Jamie Marigold

 

 

1.

 

  제이미는 차가운 바람이 들면 집안에 냄새가 남아도 환기를 시키지 못할 정도로 허약했다. 그는 호그와트에 입학하기 전까지 집안에서 지냈다. 발길이 끊이지 않는 런던의 교외, 마을 사이의 굽이치는 길을 따라 들어가면 언덕 위에 나오는 조그만 책방. 메리골드의 피를 이은 사람들은 마법에 걸린 것처럼 자연스럽게 책을 사랑했고 제이미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안은 루크 메리골드의 소망을 이어 책방을 지켰고, 아무리 몸이 약해도 책을 손에 놓지 않는 제이미를 걱정하면서도 아꼈다. 멀리서 집필 중인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을 금지옥엽으로 아끼는 아버지를 양분으로 삼으면 행복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주말은 부녀가 계절에 한 번 상점가에 놀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제이미는 아닌 척해도 여러 차례 이안에게 날씨를 묻고 쪽지에 사고 싶은 것들을 몰래 적으며 기대했다. 시간이 흐르고 금요일 저녁, 영국의 평소 소나기보다 훨씬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안은 책방의 문을 닫다 머뭇거렸다. 늘 흐린 날씨에 따라 외출을 취소하겠다 마음먹은 건 한두 번이 아니었어도 딸을 타이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런데 입을 열기도 전 제이미는 이안의 바짓단을 쥐고 웅얼거렸다. “거,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은 안 나갈게요.” 도리어 놀라서 무릎을 꿇고 안색을 살피니, 아쉬움을 눌러 참느라 벌게진 얼굴이었다. “대신 책을 정리하는 건 괜찮죠?”

 

  이안은 겨우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무리하지 않는다면.”

  “그럼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아빠.”

 

  다음 날 제이미는 예상외로 밝아진 얼굴을 하고 뛰어왔다. 선반 아래를 지나가고 있을 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져서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았는데, 상자가 공중에서 우뚝 멈췄다 말했다. 오래된 서고를 정리하다 엄청난 행운을 발견했다며 반짝이는 눈으로 하는 말을 듣던 이안은 아연했다. 한참 신이 나 있던 제이미가 굳어서 눈치를 봤지만, 이안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말 뒤에 본심을 물었다.

 

  “제이미, 상자는 어떻게 되었니?”

  “잘 모르겠어요. 그냥 두고 나와버려서……. 그, 그러면 안 돼요?”

  “아니, 잘했다.”

 

  아찔한 돌덩이가 심장에 내려앉았지만 세차게 비가 내릴 아침으로 돌아가더라도 함께 외출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이안은 생각했다. 머리를 쓸어주던 손길이 뺨으로 내려오자 제이미는 숨을 삼켰다. 이안은 상자를 숨긴 어린아이가 얼마나 심장을 졸이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2.

 

  우리 엄마가 『온도에 새긴 숫자』의 팬이어서 그 작가 책은 다 알아. 예전에는 자기 전마다 읽어주시는데 노이로제 걸릴 지경이었다니까.

  그거 누가 썼더라?

  미아 플로렌스. 그런데 신간이 안 나온 지 오래됐더라구.

  아, 미아 플로렌스라면 13년 전에…….

 

  캐리어에 기대 잠들었던 제이미가 바깥을 지나치는 말소리에 반사적으로 깼다. 웬만하면 돌아가는 기차에서 친구와 개구리 초콜릿을 사 먹었을 텐데, 오래 짐을 들고 걷는 일이 피로했던 덕이다. 칸칸이 나뉘어도 방학에 들떠 소란스러운 기내에서 어머니의 이름이 들릴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열차의 문을 열어젖히고 졸음에 비틀거리며 머리를 내밀었지만, 이미 주변은 텅 비어 있었다.

  이안의 말에 따르면 미아는 우리와 소식을 주고받기에는 한참 먼 곳에서 글을 쓰지만, 제이미를 깊이 그리워할 거라고 했다. 제이미는 킹스 크로스 역을 거쳐 메리골드에 도착하자마자 이안을 끌어안았다가 떨어지며 도착한 편지는 없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호그와트에 입학하기 전 제이미는 매일 우편함을 직접 확인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어느덧 방학이 되어 돌아와서도 그랬다. 도착한 소식은 없었다. 이안은 제이미를 다시 안아주며 타일렀다. 미아는 네가 많이 보고 싶어 할 거야. 제이미는 그 말에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방학이 되면 제이미는 늘 학교를 알기 전의 시절로 돌아갔다. 브리지트가 협탁에 널어둔 목도리를 다나가 개켜두면 덩달아 바닥의 먼지를 쓸던 일이 다 꿈만 같았다. 이안은 여전히 제이미를 그늘에 두느라 친구들을 만나러 가지 않길 권했다. 아쉬웠지만, 제이미에게는 위안 삼을 증거가 있었다. 재작년 데려온 부엉이는 방학 내내 소식을 물고 날랐다. 친구들은 제이미에게 선물로 흔적을 남겼고, 이안은 제이미가 있을 공간을 내어주며 관심을 기울였다. 직접 만나지 못하는 대신 친구들의 이야기를 계속 묻고 한없이 들어주는 것으로. “아빠는 가끔 저보다 제 친구들 이야길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럴 리가, 우리 딸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그렇지.” 제이미는 갸우뚱거리다가도 조그맣게 웃음을 터트리느라 한 자리에 붙박여 지내도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은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태어난 순간 곁을 떠나서 오래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미아 플로렌스 메리골드. 이안과 자신을 앞질러 책 속으로 바삐 떠난 여행자. 조금도 멈추지 않는 나그네. 방학의 막바지에 제이미는 순례자의 길을 가깝고 깊은 곳에서 찾아냈다.

 

 

3.

 

  위대한 인어가 모세처럼 바다를 갈랐다. 수면 아래의 생물을 받들어 뭍 위로 올리고 인어를 인간으로, 마법사로 만들었다. 마땅한 근거 없이 구전되는 신화에 따르면 사람들은 곧 산란기의 연어와도 같다. 고향을 새로이 정했다는 것만이 다르다. 연어는 자신이 알을 깬 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마법사들의 강이란 처음 눈을 뜬 바다가 아닌 뭍이다. 그리고 물길에 쓸려 내려가도 폭포를 뛰어넘어 땅에서 생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그러니 연어와 인간의 출발지가 다르더라도, 귀소본능은 같은 방향으로 적용된다.

  제이미는 엔리케가 준 책을 덮고도 인어의 전설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다. 마법사와 머글을 특별히 구분 짓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마법에 발을 들인 후 다른 삶을 살았지만 그건 선의로 보답하는 사람들 덕이었다. 미아가 다녔던 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달라졌다. 마법은 매개가 될 뿐.

  다만 그는 새끼 오리처럼 사람의 관성에 따른다. 친구들과 나누어 먹던 젤리빈은 혼자 있을 때도 자주 손이 갔다. 그는 『인어의 후손』을 받고 나서 많고 많은 읽을거리 중 어릴 적 이안이 무릎에 앉힌 채 읽어준 동화를 찾아보고 싶어졌다. 제이미는 손끝으로 가지런히 꽂힌 책등을 훑으며 책방을 가로질렀다. 이안은 잠시 아랫집의 전등을 손봐주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워낙 얇은 책이라 쉽게 찾을 수 없었고, 작은 오기가 생겼다.

  손님이 오가는 바깥의 책들은 이미 한참을 둘러보았다. 남은 곳은 창고밖에 없다. 노끈으로 묶어둔 책 꾸러미를 건너 좁은 틈에 발을 디디자 케케묵은 냄새가 났다. 문을 밀고 등잔을 켜자 하얀 먼지가 날아다녔다. 구식 라디오나 오르골, 빈 액자가 선반 위에 어지럽게 널렸고, 누군가 뜨개질을 하다 말았는지 털실 뭉치가 엉켜 발에 챘다. 제이미는 물건 더미를 걷어내고 지나치려다 동화책 대신 반질거리는 나무 상자를 발견했다. 힘을 들이면 품에 안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몰랐다. 잡동사니를 몰아넣는 상자라고 하기에는 뚜껑의 결이 공을 들여 깎아낸 듯 고르다.

  협탁 위에 상자를 올려놓고 열자마자 안에서 얼룩진 깃펜 무더기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제이미가 재채기를 하며 깃펜을 차례로 줍고 고개를 내밀었다. 색색의 잉크병과 양피지가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그 중 굳이 옷장에 두지 않은 옷가지가 신경쓰였다. 아래에 있는 두툼한 카디건을 끄집어내자, 검은 섬유 줄기가 낡아 끊어질 듯 연약하면서도 젖은 풀꽃 냄새가 섞여서 났다. 몸에 대보니 제이미에게는 어깨가 남고, 이안보다는 체격이 작았다. 제이미는 순식간에 불길해져서 커다란 거울의 표면을 닦고 앞에 섰다. 사람이 보였다. 그 사람은 자신 같기도, 자신이 아는 다른 누군가 같기도 했다. 제대로 겉옷을 걸쳐보고 나서야 확신했다. 제이미는 이 옷을 머리맡에 두던 사진에서 보았다.

 

  “이건……. 엄마 거잖아.”

 

  주머니에서 봉투 한 장이 떨어졌다. 실링 왁스가 떨어진 흔적을 보아 이미 열어본 편지였다. 제이미는 떨리는 손을 갈무리하고 안에 든 종이를 꺼냈다. 멀리서 염려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미? 얘가 어딜 갔담.” 그러나 편지지에 싸여 있던 열쇠를 쥐느라 듣지 못했다. 시선은 하염없이 서두부터 훑어 내려가는 대신 아가미를 도려내고 부레가 터진 물고기처럼 굳어버렸다. 구둣발을 끄는 소리는 가장자리를 돌아 가까워졌다. “이상하다, 창고를 열어둔 적이 없는데…….”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제이미. 거기에 있니?”

  이게 아마도 마지막 편지가 되겠지.

  “…….”

 

  빛이 들어오는 문턱에 덜컥 멈춰선 이안의 그림자가 맞은편 벽으로 기울어졌다. 훌쩍이느라 들썩이는 어린아이의 어깨가 초라했다. 이안이 입을 열기도 전, 제이미는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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