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두 배로 땀을 흘린 덕에 눈은 쉽게 멀었다. 마사는 그나마 아는 지인에게 몇 통 안 되는 편지를 쓸 때마다 꽤 애를 먹었다. 투박한 솜씨로 적어내린 글귀는 사실 오랜 시간을 들여 정제되었다. 그러나 마사는 탁한 눈동자 안에 특별히 담고 싶은 풍경이 없어 쉽게 미련을 지웠다. 마사에게 눈 뜬 장님은 손실을 반감할 만큼 큰 이점으로 작용했다. 적어도 탐탁찮은 눈과 똑바로 마주쳐도 두렵지 않았으니까. 이득은 취하고서 남들보다 느리게 신문을 읽고, 천천히 쓰고, 길은 팔에 스치는 온기와 한기에 의지하면 된다.
배 위에는 못 오를 것 같았습니다. 부두에서 조금 더 멀어져야 할지도 모르고요. 마사는 아벨의 말에 쉽게 긍정하며 공연을 포기했다. 그는 거리가 부두에서 멀리 떨어진 배의 소리를 귀담아 들을 만큼의 기본에서 동떨어졌다. 마사는 매사 우유부단하게도 미련이 없었고, 그 대신 아쉬움이 남은 상대에게 여유를 내기로 했다.
마사는 사람과 사람의 온기에 위안을 받는다. 동시에 실금 같은 불안을 느낀다. 단단히 맞잡은 손이 풀릴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선상의 먼발치에서 두 사람은 공연장에 물밀듯 들이치는 사람들을 보았다. 더욱 먼 거리의 무대는 아벨에게도 뚜렷하게 보이진 않았겠지만 목적은 무용이 아닌 음악이라 눈을 감아도 충분했다.
공연이 중단되고 머지 않아 실금이 갈라져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 마사는 후회했다. 아무리 멀고 멀어도 하늘에서 내리는 꽃잎은 쳐다보기에 홧홧했다. 습관적으로 힘이 빠진 손을 도로 움켜쥐고 당겼다. 시야가 가려졌다가 뚜렷해진다. 먼지바람이 이는 전장이나 뺨을 타고 뜨겁게 흘러내리는 피처럼. 그 아래에는 항상 죽은 사람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축 늘어진 사람은 눈 사이로 발굴해낸 눈사람 같기도 했다.
아우성이 높아지며 쏟아져나오는 인파에 숨을 들이마시기 어려웠다. 덜컹, 호프먼 대위! 덜컹. 덜컥, 탕! 덜컥……. 고개를 숙이자 선로에 열차가 내려앉다 솟는 것마냥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부둣가에 매달아둔 불은 아벨의 옆태를 완전히 밝힐 수 없었다. 마사는 눈썹을 찡그려도 그림자 속의 표정을 읽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입술을 닫은 채로 말했다. 호프먼 형제님, 괜찮으십니까?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Miserere mei, Deus, secundum magnam misericordiam tuam……. 벨벳 의자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티테이블과 촛대가 밧줄을 엮는 동안 흘러나온 자비와 자애를 바라는 속죄는 성가에서 비명으로 변질되었다.
마사는 지독한 두통을 느꼈다. 배배 꼬인 뇌의 그물에 사념이 밀물처럼 들어찼다.
마사, 브랜디 글라스로도 할 수 있는 게 많지.
한낱 술잔이 다 무슨 소용이오?
예를 들어 이 포크가 사실 사람이 변한 상황이었다든가… 부인이 브랜디 글라스고 제가 촛대인데 사실 제가 부인을 구해준 일이 있다거나…….
말이 되는 말을 해야 말이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상하게 변한 사람들은 많은 것 같다.
이런 작자들이 얼마나 더 있는지 아시오?
저번에도 테라스에서 다같이 만났었어요. 마녀가 티타임을 가진다고 했습니다.
서로 아는 사이인가?
걱정 마세요. 전 이런 건 안 잊어버리거든요. 그럼 이따 봐요?
나는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마사 호프먼의 행복은 무엇인가요.
내 행복은 실패를 모조리 잊어버리는 것이오.
당신만? 아니면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이?
나만이라도.
아! 죽음은 자각의 매개였던가. 그는 첫 사상자를 내고 격려를 받을 때 가장 두려웠다. 배우자를 쏘고 중위로 강등되었을 때 가장 볼품없었다. 그리고 기피했던 일의 무책임을 지금에서야 떠안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실패가 되었다. 마사는 부끄러움에 풀린 무릎을 지팡이로 지탱하고서 뒷걸음질을 쳤다. 호텔로 향하는 뒷길을 한 번, 바다를 한 번 둘러보니 나약해졌다. 돌아가는 길은 여태껏 애써 디디고 건넌 징검다리였다. 성격의 대물림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자취를 겁에 질려 되돌아가는 꼴은 곧 아버지에게로 향하는 것이었다. 마사는 밟아온 길에서 아버지를, 걸어온 길에서 도망치는 자신을 발견하고 아벨의 손을 간신히 움켜쥐었다. 사생결단에 훼손된 명예가 진흙처럼 다닥다닥 붙어 속도가 나지 않았다.
그는 싸늘하게 식은 사람을 깨우칠 때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 죽고 싶었다. 그러나 생을 마감하기에는 스스로 겨눈 탄환을 빗맞출 정도로 살고 싶었다. 그 점을 인정하기 싫어 쿠르트가 행여나 하는 걱정에 담아준 약은 모두 옆의 남자에게 주었는데, 지금은 그와 자신이 다를 바가 없어 괴로웠다. 그래도 붙든 손은 놓지 말아야 했다.
채워지는 핏물을 비우려면 책임과 과실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해가 지고 나서의 왕래가 번거로워지자 마사는 도로 술을 입에 대는 일이 늘었다. 꽃향기에 물든 악몽이 사그라들자 마사는 좀 더 길게 잤다. 아무리 감이 좋다고 해도 촛불에만 의지하려면 내내 방 안에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사가 홀로 하던 일은 술을 마시거나 깊이 눈을 감는 정도였다.
마사는 데보라에게 술을 잊지 않기 위해 마신 적은 없다고 했지만, 지금은 충실히 이탈하고 있었다. 게다가 낮의 일을 생각하면 불쾌해졌다. 마사가 누워 뒤척이던 때 선객이 객실의 문을 두드리길래 의심없이 열어주었더니, 아벨 대신 웬 신부 하나가 서 있었다. 세 박자 늦게 생각해보면 아벨은 마사가 입을 열지 않아도 신분을 밝혔다. 아벨이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조약돌의 탑이었다면 문을 차지하고 선 존 델가도는 고목 같았다. 마사는 자신과 비슷할 나이에 신에게 의지하는 그가 달갑지 않았다.
“뭘 하러 왔다고?”
“기도문을 나누려 하오.”
마사는 곧장 델가도를 내쫓는 대신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와 비슷했고 별다른 차이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걱정의 이유로 봉사자를 자청하며 찾아온 델가도는 마사의 눈치를 꿋꿋하게 살핀 다음 덧붙였다.
“짐을 나누어 드는 데에는 간소한 말도 도움이 된다오.”
“…….”
“자리에 앉아 가만히 있어도 좋소. 내가 대신 기도하리다.”
마사는 신부가 서서 기다리기 지칠 만큼 오래 침묵했으나 상대는 철저히 베풀었다.
“얼마나 그렇게 기도했나?”
“글쎄요, 적어도 이곳의 사람은 죄 만나보려 합디다.”
“누구든 상관없이.”
“믿는 자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소.¹⁾ 그렇잖아도 쓰러진 총지배인을 살피고 오는 길이외다. 다른 형제께서 신고해주었으니 해결도 될 테요.”
“……다른 형제는 누구요?”
“보헤미안의 여행자였소만.”
마사는 국적을 빼앗긴 이후로 신이 불공정하다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배부른 자에게 기름이, 가난한 자에게 쭉정이가 주어질 리가 없었다. 한때 간절한 염원에는 응답해주리라는 조언을 따른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기대마저 무너진지 오래였다. 마사는 온전히 자신을 지지해줄 사람이 되어줄 수 있냐 비꼬려다가도, 델가도 신부라면 그리하겠다고 답할 것 같아 제쳐두었다. 신부는 여전히 마사가 억센 속내를 털어놓지 않아도 헤아리겠다는 듯 마사가 기도문을 받아새겨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길 바랐다. 그 태도는 마사의 자존심을 긁기에 적절했다.
“당신이 성심성의껏 남을 돕고 있다는 것은 잘 알겠소. 허나 나는……. 교화할 의지를 빚기에 너무 늦었소. 그렇다고 바뀔 마음도 없고.”
“나는 비슷한 사람을 많이 만나봤지. 문제는 없지만 필히 강요할 생각은 없소.”
“하. 그렇다면 이야기가 편하겠군. 다시는 찾아오지 말아주시게. 그게 내가 위안을 얻는 길일 거요.”
방문이 닫히자 마사는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문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는 깨어있는 시간이 불쾌해 잠을 청했다가, 끝내 잠들지 못하고 일어나 술을 찾았다.
어느덧 굴러다니는 술병을 차고 잔뜩 취해 방 밖으로 나서자 어둑어둑한 대신 선선한 바람이 들이쳤다. 꼬릿꼬릿한 술 냄새가 나도 기분은 한결 나았다. 멀리서 불빛이 보이는 것도 같은데. 저쪽에는 전기가 들어오는 건가. 아니, 초를 몇 개 세워놨다고 했지. 마사는 걸음을 재촉하며 눈을 감았다. 앞이 잘 분간이 되지 않아 오히려 어디에도 남지 않고 고립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행진하던 마사는 불쑥 튀어나온 물체에 그대로 꿍 부딪혀 사색을 깨뜨렸다.
“아얏!”
마사는 한 발 밀려나 우뚝 섰다. 복도에 달린 전등이나 협탁이라기에는 똑같이 물러날 수 있고, 물컹한……. 사람이었다. 촛대를 든 남자가 가슴에 얹은 손을 쓸어내리며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항상 앞이 어두워 되려 밤에도 얽매이지 않는 노인은 늦게 가늘게 뜬 눈으로 청년을 훑었다. 흠, 촛대는 꾸물거리지 않았군. 주렁주렁 매달린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가 굴러나가, 남자는 팔꿈치로 맞은 옆구리를 문지르며 그것을 줍고 마사를 흘겨봤다. 마사는 그러거나 말거나 지팡이로 장애물의 발을 밀어냈다. 저쪽이 바람이 더 잘 들 것 같으니 이 남자가 서 있는 길을 지나쳐야 했다.
“앞 좀 똑바로 보고 다니시오.”
그는 황당하다는 얼굴을 한 남자를 가볍게 뒤로 했다. 워낙 멍해진 탓에 그제서야 항변을 위한 입이 조용히 달싹였지만, 휑한 자리에는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저기요? 볼 앞이 없는데 어떻게 앞을 보란 말입니까? 릭은 멍청한 얼굴로 억울함을 삼켰다.
“이젠 좀 기억이 나쇼? 브랜디 글라스를 한동안 까먹고 지내는 것 같더니.”
“놀리고 싶은 거라면 그냥 가는 게 좋겠소. 자네는 매번 방해만 되는군.”
“에이, 거 쩨쩨하게 굴긴. 그렇다면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겠군.”
눈앞의 여행자를 만난 것은 두 번째였으나, 그는 변함없이 뻔뻔했다. 미니 바의 길을 찾아주던 능청스러움은 어디서 유래된 건지, 마사는 거절하는 것조차 피로해 앞을 보고 걸었다. 위젠필드의 두 걸음은 마사의 세 걸음이었기에 그는 여유롭게 콧수염을 쓸었다.
“통신이 먹통이 된 건 알고 있수?”
“모르는 편이 이상한데.”
“처음부터 갈레타 섬이 그 꼴이었지. 내가 나설 수는 없어 때를 기다렸지만 말요.”
“방랑자가 뭘 한다고 그러는가?”
“그건 가짜 신분이고.”
“가짜?”
마사는 위젠필드를 응시했다. 꽃밭을 따라 난 산책로를 거니는 사람은 둘밖에 없었고, 그는 진지해보였다. 꼭 진실을 말하는 것 같기도 했고, 속이려 드는 것 같기도 했다. 거짓을 내보여 마사를 속이려는 깡을 세우려 들었든, 혹은 여태껏 진실을 숨겨왔든 어느 쪽에든 능숙하게 표정을 관리하는 습관은 길을 들였는지 마사는 속이 갑갑해졌다.
“진짜는 경찰이라고. 나는 야로미르 슈체르반, 왕실의 비밀 경찰이자 협력 수사관이요. 국왕께서 내리신 밀명으로 온 거요.”
“…….”
“많이 놀랐수?”
“그보다는 이해할 필요를 찾지 못했소만. 용건이 뭐요?”
“하나보다는 둘, 둘보다는 셋이 낫지. 최대한 많은 정보가 필요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지만, 주도자만 있다면 최대한 많은 정보가 모여야 상황을 휘어잡을 수 있고.”
“자네가 얻고자 하는 정보는?”
“지금 상황이 난처하게 돌아가고 있수다. 그렇잖아도 통신 시설이 고장나 있었으니, 공자께 일이 일어난 이후로는 내부를 의심할 수밖에 없더군. 나는 총지배인이 계속 걸려 지켜보고 있었고.”
“나를 신뢰하는 거요?”
“돌아다니면서 협조해줄 사람을 찾고 있지. 수사하는 데에도 꽤 품이 드니 고양이 발이라도 빌리는 수밖에. 아, 이건 농담이외다.”
“별로 재미는 없었소만.”
“주제로 돌아가면, 당장 언제 베네치아가 입항할지도 불분명하니.”
“그렇다 해도 문제가 안 된다면?”
“……?”
위젠필드가 걸음을 멈추자 마사는 옆을 걸어 앞질렀다. 다시 그가 보폭을 넓혀 마사의 옆에서 걷자, 마사는 흘긋 숯검댕 같은 턱수염에 시선을 두었다. 자신을 다 안다는 듯 굴면서 족제비처럼 이득만 취하려는 그가 못마땅해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사람 하난 잘못 찾았군. 내가 자네 말을 무시하면 손해 보는 건 내가 아닌 자네일세. 그렇게 눈치가 빠르더니,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진 모르는가보군.”
“그것까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거라 생각하쇼?”
“쉬기 위해서. 우연히 영원을 얻는다 해도 미련은 없어야 하네.”
“허허, 그것 참 공교롭게 되었수.”
위젠필드가 달리 말해 마음을 돌릴 거리를 찾자, 마사는 건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협조는 하겠소.”
“슬슬 포기하기 전에 말해줘서 다행이군.”
“단, 자네한테 허용하는 선은 지배인에게도 허락한 정도일 거요. 나는 이 판 꼴이 어떻게 돌아가든 전혀 손해볼 게 없으니까. 자네가 해결하면 여기서 나가고 싶어하는 양반들에겐 참 좋겠고, 아니면 말고. 그러니까 깊이 인정 받으려면 신분을 증명할 증거를 가져오시오. 그 부분에서는 지배인이 훨씬 낫군.”
마사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어깨를 폈다. 위젠필드의 안경 너머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뚝뚝한 마사의 반 정도 호의적인 답안에 만족했고, 마사는 원하는 답을 들려줬으니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이만 가보라는 듯 손짓을 했다.
“나는 죽는 것보다 피곤한 일을 만드는 게 질색이오.”
마사는 전역 이후로 될 대로 되라며 살아, 누군가와 부딪혀도 다시 볼 일이 없겠거니 지나치기 일쑤였다. 그때 돌아오는 반응은 불쾌하다는 듯 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쳐다보거나, 직접 불러세워 한 소리 늘어놓는 둘 중 하나였다. 아주 가끔은 뒤쫓아오는 사람도 있었지. 마사는 단순히 귀찮다는 이유로 변명할 틈조차 주지 않고 쌩하니 가버렸기에 대부분은 전자였다. 릭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호텔은 영국에 비해 훨씬 좁아 마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릭과 재회했다. 릭은 맞은 것을 기억하는 듯 했지만, 금세 차치하고 마사를 예의바르게 불러세웠다. 마사는 떨떠름하게 쳐다보았다.
“릭이라고 합니다. 사회부 기자죠. 혹시, 실례지만 성함이?”
“마사 호프먼일세.”
“호프먼 부인, 최근 일어난 사건에 대해 몇 가지 미심쩍은 부분이 있지 않으십니까? 여러모로… 수상한 인물도 있고요.”
릭은 손을 입가에 대고 속삭이며 저만치 사라지는 위젠필드의 눈치를 봤다. 마사는 멀어지는 인기척을 응시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누군가와 찰싹 달라붙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병이라도 걸렸는지, 혼자 걷고 있으면 끈질기게 사람이 따라붙었다. 마사는 이 호텔에서 사람에게 완벽하게 선을 긋는 일은 부질없다는 것을 알고, 제시와 헤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건 릭에게 질린 얼굴을 했다.
“별 도움은 안 될 거요. 내가 아는 건 자네가 알 만한 것밖에 없을 테고.”
“그거야말로 대봐야 아는 일이죠!”
릭은 수많은 거절의 경험을 통해 마사의 말이 간접적인 긍정임을 잘 알았다. 그는 맞다, 하고 무언가 떠오른 얼굴을 하더니 슬쩍 물었다.
“이번엔 술 안 드신 거 맞죠?”
“마셨어도 뭐가 문제라는 거요?”
“그야… 술을 먹으면 판단 능력이 흐려지고… 그러면… 정보 공유에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 내 머리를 의심하는 겐가.”
“아니, 그건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오해죠. 그러니까, 만일에 만일을 위한.”
“……뭐가 다른 거요?”
결국 릭은 눈칫밥을 먹고 자란 경험으로 배운, 스물은 더 많은 사람을 배려하는 법을 이행했다. 두 사람은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았다. 찌르르 우는 새소리가 정원의 분위기를 환기했다. 곁다리에 다알리아가 피어 발을 움직일 때마다 흔들거렸다. 그는 나쁘지 않은 인터뷰 장소에 으쓱하고 본격적으로 받아적을 준비를 했다.
“평소에 제시 위젠필드 씨와 친분이 있는 편이십니까?”
“오히려 잘 모르오. 지난번에 한 번 같이 걸었던 적은 있소.”
“그렇군요. 무슨 일로 동행하셨습니까?”
“길을 찾아주더군.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말요.”
과거의 일을 복기하고 퉁명스러워진 말투에도 릭은 꼬박꼬박 받아적었다. 어조에 비해 내용은 고분고분했다. 예전부터 제시 위젠필드는 호텔 투숙객과 거리를 좁히려 시도했다, 자신에게 그랬듯 실제 신분을 비밀 경찰이라며 협조를 요청했다, 신부는 부상자를 살피고 오는 길이었다……. 마사가 아는 대로 죄다 털어놓았다는 걸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릭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핵심 질문을 마무리했다. 위젠필드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준 만큼 질문에 대답해주지 못할 이유도 없었지만, 순수한 기자의 끈기에 내심 감탄했다.
“유독 진상 파악에 열심인 것 같군.”
“뭐, 당신은 궁금하지 않습니까? 서로가 완전히 서로의 의견을 상충하고 있잖아요. 누군가는 반드시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건데,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을 한다니……. 충분히 의심할 만하지 않나요?”
“어차피 자네 같은 사람이 해결해주지 않겠나.”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지 추리하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제가 할 줄 아는 건 정보를 모아서 그걸 글로 적어내는 것뿐입니다.”
“그런가.”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누구나 추리라는 걸 시도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찌됐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러니까 추리를 시도하는 릭에게 온전히 결정을 맡겨버리면 되지 않나? 마사는 제 질문이 원점으로 돌아왔다는 말을 조용히 접었다. 릭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첩을 한 장 넘기더니 마사가 볼 수 있도록 무릎에 내려놓고 펜으로 문장 두 개를 썼다.
“큼, 경찰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누가 범인이냐’라기 보다는 ‘누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냐’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겠죠.”
차례로 동그라미를 치며 릭이 말했다. 사건에 몰입한 반응이 은근히 솔직하고 시원시원해서, 마사는 글자를 읽지 않고도 내용을 대강 짐작했다.
“내가 아는 그 양반과 신부로 얼추 정보가 모였으니 같이 신뢰를 가려보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릭이 손가락을 튕겼다.
“바로 그겁니다! 정보가 아닌 의견도 취재에는 도움이 되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그 사람의 말을 어디까지 믿으십니까? 특별한 위화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나요?”
“흠. 내가 협조한다고 해서 수사에 진척이 생길 수 있긴 한지 의문이었군. 그게 이상해보였소. 더군다나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섣불리 발설할 위험성은 따지지도 않은 건지, 참.”
“글쎄, 진척이 생기긴 하겠죠. 호텔에 갇힌 이상 우리 모두 이 사건의 용의자이자 증인이 되는 셈이고, 우리가 내놓는 작은 단서 하나가 수사관인 그에게는 커다란 증거가 될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우리가 총지배인에게 이야기 할 것도 염두에 둔 것이 아니겠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이미 과대평가하고 있구만.”
“저라고 해서 그 사람을 다 믿는 건 아닙니다. 그저 그가 잠입 경찰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만큼, 그가 그 말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설명하려던 것뿐이죠. 물론, 그런 거짓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것엔 저도 동의합니다. 적어도 그가 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어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그렇지만 나머지 작자들과 다를 바 없이 의심하네. 마음이 기울일 연유가 더는 없지 않은가.”
“과연 그것 뿐입니까? 그가 한 발언과 총지배인과 관련된 어떤 부분에 약간의 모순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이건 당신에게만 꺼내는 정보지만… 그 자가 최근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또 성격이 나쁜 것도 아닌지라 니콜로 씨에게도 진작에 인사를 해두었죠. 그런데 온갖 상처를 달고 있었더군요. 그래, 마치……. 루시엔 씨처럼.”
릭이 울긋불긋했던 루스의 얼굴을 예로 들며 눈썹을 찡그렸다. 마사는 촛대와 타르트를 떨군 남자는 연결지었어도 이름의 상관관계는 아직 찾지 못해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고, 릭은 다시 명쾌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비로소 왜 전등이 아닌 촛불이 길을 밝히고 있는지 원인을 파악한 마사는 지배인의 미련한 행동에만 콧김을 내쉬었다. 릭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여튼 이 증언까지 고려하면 세 분의 말이 서로 아귀가 들어맞지 않다는 겁니다.”
“하기사 통신 시설이 부숴졌으면 신고가 불가능했겠지. 여러 가닥이 있겠지만… 신부와 위젠필드가 공범이라면 공격한 사람이 델가도 신부인 것도, 그 신부가 지배인을 돌봤단 것도 동시에 일리가 있을 것 같은데 말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세 명 모두 수상합니다. 흐음. 만약 한 명을 믿어야 한다면 당신은 누굴 믿을 겁니까?”
“꼭 골라야 하오?”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이니까요. 참고로 삼죠.”
“굳이 따지면 차라리 아까 그 양반이겠지.”
“아까 전에는 그를 너무 과대평가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릭이 이죽거렸다.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자네와 다른 이유일 거요. 지배인은 딘 쉘튼 살인사건에도 특별히 몸수색 없이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을 돌려보내거나, 판도라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했네. 평판이 훼손되리란 걸 알고도 그랬으니 어느 정도 가담했다고 보오. 이게 내가 처음 짐을 풀었을 때부터 호텔의 서비스에 기대를 걸지 않은 이유일세. 나머지 둘은… 그래, 자네 말대로 사람들을 탐색하려 이 말 저 말 하고 다니는 것일 지도 모르네만.”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그럴 겁니다.”
“어쨌든, 내 이유는 그 비밀경찰의 신분에 책임이 달렸기 때문일세.”
“그 말이 진실일 경우의?”
“자네의 의욕에 물을 들이붓는 말이겠다만 그 셋 중 누가 거짓을 말하든 상황이 나아지진 않을 거요. 다만 경찰이라면 무언가 걸어볼 수 있소. 그 신분이 가짜라면 원점이 되니 손해볼 것도 없고.”
“확실히, 지금 상황에선 경찰이란 신분이 가장 안전하긴 하겠죠.”
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그만 수첩에 몇 자를 더 적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장황하게 말을 하는 게 오랜만이라 목이 갑갑한데, 기자는 되려 이 교류에 신나있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거절하기에는 릭은 위젠필드와 다르게 열정에 불타 감정이 고조된 어린 청년이었다. 마사는 자신에게 끈기 있게 좋은 말만 늘어놓던 랄프를 당해내지 못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그리고 릭에게 지치지도 않는지 묻거나 물을 찾는 대신 목을 한 바퀴 빙 돌렸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누굴 의심할지요? 저는 오히려 지배인을 제꼈습니다. 그는 전선을 끊었되 나머지는 저지르지 않았을 겁니다. 나머지는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죠. 수사관이라고 주장한다는 것과, 총지배인을 공격했다는 것.”
“그 추리에는 총지배인의 입장에 기울어져 있는데. 설마 객관적인 사실보다 호소를 믿나?”
“사회부 기자란 게 원래 다 억울한 사람 취재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당신이 총지배인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해서 그럴 겁니다. 감상이 달라질 걸요. 더군다나 그는 호텔의 총책임자이기 때문에, 되도록 자신의 커리어를 최우선으로 생각할 겁니다. 단선도 열차가 오지 않는 변명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한 게 아니겠습니까? 호텔 판도라에 여러 사건사고가 생긴 지금, 가장 큰 책임을 물어야 할 건 니콜로 키엘리니니까요. 또,”
“그만. 나쁘다고 말한 건 아니었소.”
마사가 억울함에 열변을 토하는 그를 가로막았다. 워낙 지배인을 불신했던 것은 제쳐두고서라도 세 사람 다 정이 안 가서, 마사는 자작극이나 단순한 사고의 가능성도 고려했지만 금세 놓아버렸다. 릭이 눈을 깜박이다가 이마를 문질렀다.
“끙, 알겠습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저는 정보를 수집한 만큼 판단하는 겁니다.”
“동의하니 넘어가지.”
릭은 여전히 궁시렁거리며 손에 땀을 쥐느라 모서리가 운 종이를 주섬주섬 폈다. 마사는 한시라도 멈추면 정체될 것처럼 말과 걸음을 재촉하던 릭을 구경했다. 그 모습은 고집스럽게 동전을 문 까마귀 같기도, 나뭇가지와 짚단을 모으는 비버 같기도 했다. 마사는 그 입을 어떻게 틀어막을까 고민하다 물었다.
“흠, 요즘 애들도 사탕을 좋아하나?”
“그건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호텔에 머무르고 있는 메리 양을 생각하면… 좋아할 것 같기도 하죠. 아, 마침 제가 진작에 인터뷰 했었거든요.”
릭이 몰두한 채로 수첩을 넘기며 메리의 기록을 찾는 동안 마사는 턱을 문지르다가 손가락을 까딱했다.
“말고. 자네가 삐친 것 같으니 말일세.”
“예? 전혀 아니거든요?”
∴
“그래서 말인데, 저는 그렇게까지 놀란 건 아니라 괜찮지만 지배인님이 너무 안 됐어요.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셔서 깜짝 놀랐거든요.”
“그 자가 자네에게 뭐라 하던가?”
잠시만요, 도로시가 주의를 집중하고 투구했다. 굴러간 공이 볼링핀을 와르르 넘어뜨렸다. 도로시가 가볍게 탄성을 내지르는 동안 마사는 다른 볼을 골라 집어들었다. 고개를 들어 확인한 핀은 네 개 남아있었다.
“처음치고는 나쁘지 않군. 이건 13파운드인데 좀 더 무겁소. 대신 힘이 금방 실리지. 이번에 남은 핀을 다 치는 것을 목표로 해보게.”
“그래도 네 개는 아직 많은 걸요. 이렇게 손가락을 끼우면 되는 건가요?”
“약지는 괜찮지만 그 정도로 중지가 벌어지면 안 되네. 이걸로 다시.”
“음, 이게 좀 더 폭이 좁네요. 확실히 더 나은 것 같아요.”
도로시는 진지한 얼굴로 발을 앞으로 내밀고 볼을 제대로 받쳤다. 마사는 팔짱을 끼고 지켜보다가, 도로시가 어깨를 들썩이며 호흡을 고르자 애꿎은 레인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어설프지만 열심히 스텝을 밟은 도로시가 팔에서 힘을 덜 빼고 볼링공을 던졌다. 쿵! 데구르르……. 도로시가 침을 삼켰고, 방향이 살짝 어긋난 채로 정직하게 굴러간 스트레이트 볼이 핀을 하나만 남겨두고 오픈 프레임으로 마무리되었다. 도로시는 눈에 띄게 아쉬워했다.
“와, 아까워요. 그래도 이렇게 하는 거군요?”
“그래. 그리 어렵진 않소. 단기간에 배울 수 있으니 호텔에도 볼링장이 있는 거겠지. 뭐, 귀한 양반들의 취미라는 이유가 더 크겠지만.”
“하나라서 맞추긴 어렵겠지만, 이번 공으로는 다 넘어뜨릴 수 있을 지도요. 방금 주신 공이 잘 맞았거든요.”
“자네 차례는 끝일세. 이번에는 나요.”
“아! 맞다. 깜빡했네요.”
“손수건은 있소?”
“손수건이요? 있어요. 선물 받은 거긴 하지만……. 필요하세요?”
“아니, 자네가 손을 닦으면서 기다리는 거요.”
짧게 눈짓하자 도로시는 아, 하고 웃으며 린넨 손수건에 축축해진 손바닥을 꾹 붙였다. 핀이 마름모꼴로 세워지자 마사가 새 볼을 들었다. 아무리 도로시보다 먼저 쳐본 사람이라 해도 이렇게 볼링장에 오는 건 몇십 년만이었다. 칠 년 전에는 전쟁터에서, 그 이후로는 소개받은 여관에서 지낸 탓이다. 마사는 하얗게 질려 여관으로 돌아가고 싶다던 도로시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볼링을 제안한 것은 두려움에 떨던 그를 마땅히 위로할 방법을 찾지 못했고, 마침 눈앞에는 볼링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잘못된 방법은 아니었는지 한결 나아진 낯을 한 그가 아차 싶어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을 하셨냐고 물어보셨었죠? 지배인님이 쓰러지신 동안 누가 통신시설을 부숴놨다는 거예요. 신고는 할 수 없었지만, 고객을 불안하게 만들까봐 많이 걱정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셨대요. 저희 여관은 작은 마을에 있으니까 그 정도까지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만, 상상만 해도 끔찍하더라고요.”
“자네는 어디까지 그 말을 믿나?”
파울 라인에서 몇 발 떨어진 마사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상한 질문을 받았다는 듯 도로시가 눈을 깜박거리며 미소지었다.
“음, 믿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요? 최선을 다해 호텔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니까요.”
“최선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군. 지배인은 딘 쉘튼의 죽음을 신고하지 않았소. 했더라면 진작에 알리지 않은 것이 이상하겠고. 분명한 과실이지.”
“그, 그런가요? 그치만 저런 총책임자의 자리에 오르면…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걸요…?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흠.”
마사는 볼에 집중했다가 뒤늦게 무신경한 스스로에게 상심했다. 한결 풀이 죽은 도로시가 뒷짐을 지고 손가락을 배배 꼬았다.
“……마사는 니콜로 씨를 의심하는 거죠?”
“어느 정도는. 물론 한 사람만 꼽으라면 다른 작자지만.”
“그 사람이 누군가요?”
“지배인보다는 신부일세. 독실한 신자도 아니라 무심해지는 것도 있고.”
마사는 몇 번 볼을 둥글게 문지르더니 자세를 잡고 투구했다. 핀은 한 개만 남고 전부 쓰러졌다. 도로시는 감탄했지만, 마사는 거스러미가 일어난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고는 다시 볼을 골랐다.
이곳에 온 지 며칠이 지났는지 헤아리기 어려웠다. 베네치아는 기억을 잃었다 되찾을 만큼 한참 오지 않았다. 핀을 시원하게 넘어뜨려도 먹먹한 속이 풀리지는 않았다. 도로시는 마사를 응원하려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사는 마지막 핀을 맞추기 위해 눈앞에서 사람을 치우려 노력한다. 결론을 내야 했다. 그는 차례로 세 사람을 명제에 대입해보다가, 결과를 얻지 못할 신고를 남긴 신부를 남겼다. 차라리 그 자리에 한마디의 거짓조차 어려워 침묵하는 다른 신부가 있었다면 결정이 빠르게 틀어졌을 터였다.
짧지 않은 고뇌의 끝에서 마사는 릭의 말을 떠올린다. 사회부 기자란 게 다 억울한 사람 취재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마사는 릭을 비판했지만, 신실하지 못한 감정이 섞여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비로소 제 천한 성정이 여전히 뿌리 박혀 있음을 실감한다.
손에서 힘을 빼지 못해 다음의 볼은 거터로 빠졌다.
¹⁾야고보서 2: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