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국에는 차보다 물이 더 귀하다. 마사가 다섯 살일 적 잉글랜드에는 아쌈이 유행하기 시작해, 군인조차 전쟁터에 찻주전자와 비스킷을 들고 가는 사랑이 만연했다. 프랑스에도 마리아쥬 프레르는 있었다. 한창 집안이 부유할 시기 마사는 기본을 다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동의한 어머니에게 다도 예절을 배웠다. 마사는 자고로 찻잔에 우유를 나중에 부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입대 이후로는 그것도 잊었다. 누군가의 침이 들어간 홍차를 동료들의 얼굴에 들이붓는 일은 있었지만.
마사는 낯설게 주위를 재차 둘러보았다. 바텐더 뤼시앵을 바라보는 바 테이블이 아니라, 데보라와 마사는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데보라는 회중시계를 넘겨주며 일러주었다.
“집중하세요. 이제 시계를 보면서 5분을 재면 됩니다. 정 시계가 없다면 이 정도로 수색이 진해질 때까지 기다리면 되고요. 찻잎마다 다르지만 과정은 이걸 기본으로 삼아요. 참, 앞으로도 예열은 잊지 마세요.”
“……잠깐. 분명히 별 게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까다롭잖소?”
“그쪽은 영국인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봐요.”
“부정은 못하겠군. 홍차를 마셔야 영국인이 될 수 있다면 나는 틀렸네. 무슨 재미로 마시는 건지도 모르겠고.”
“향과 기분으로 마시는 거죠. 차에 습관을 들이는 게 좋겠군요.”
“그래서 배우고 있잖나. 누말리거 다원은 5분.”
비스킷을 하나 집은 다음에야 시계를 받아들었다. 1초, 2초, 3초……. 우물거리며 티푸드를 삼키는 동안 데보라는 지루하지도 않은지 팔짱을 끼고 티팟만 응시했다. 그 시선에 몰려오는 잠을 겨우 걷어냈다. 지난번에는 술이었으니 이번에는 차라는 건가. 위스키를 입에 대고 알딸딸한 기분으로 얼굴을 붉혔던 데보라는 확실히 팔다리를 굽혀서라도 영국인의 교양에 몸을 끼워넣을 사람이었다.
마사는 지금도 가끔 호텔 판도라에 남은 사람들에 노인은 잘 없는 이유를 생각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죽음에 민감해지는지. 혹은 처음부터 판도라의 상자를 두려워할 지혜를 갖고 있었는지 딘 쉘튼 살인사건 이래로 비슷한 나잇대를 통 보기 어려웠다.
처음 동년배를 찾을 때 데보라를 만났다. 바텐더 뤼시앵의 실수로 무알콜 칵테일과 위스키 잔이 뒤바뀌어 고고한 여사는 적잖이 당황했다. 마사는 대수롭지 않게 데보라와 같은 새 잔을 주문했고 연신 기침하던 데보라를 놀려 만취하게 만들었다. 데보라는 술을 못하는 대신 주관이 확고해 가감없이 마사를 지적했는데, 마사는 말머리만 뒤틀어 되돌려주었다. 건강을 챙기지 않으면 다른 하고 싶은 일들도 잘 못하게 되지 않나요.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이 없소. 하고 싶은 일이 어떻게 없을 수 있지? 굳이 따지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되겠군.
그날 데보라는 마사와 술에 패배했다. 그는 마사에게 예전의 삶을 박탈당했을 때 무서웠다고 고백했다. 마사는 과거의 경험을 덧대 살아가므로 칠 년 전에 절망하던 자신을 데보라에게 덧씌우며 연민했다. 함부로 동정하기에 무명으로 돌아간 군인과 건반 위의 디바는 유명세의 층계가 나뉘어 있다. 그러나 마사는 데보라 영을 잘 몰랐고, 만일 알더라도 포기하는 사람 이후에는 이미 포기한 사람이 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데보라의 괴로움에 공감했다. 두 사람은 피아니스트와 군인, 간호사의 자리에서는 퇴물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데보라는 다음에는 제정신으로 만나자고 말했다. 마사는 그러든 말든 대강 고개만 까딱이며 응했다. 돌이켜보면, 평행선을 걷는 데보라가 취하지 않았더라면 교차점을 찾을 일은 없다. 그는 평범하게 부끄러워 할 줄 알면서도 초라한 자신을 포용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그 말이 이런 식으로 작용할 줄은 몰랐는데. 마사는 지극히 제정신이었다. 데보라가 구부정한 자세로 자그만 손잡이를 쥐고 찻잔을 엎어보는 마사를 지적했다.
“시간이 된 것 같은데요.”
“아직 멀었소.”
“됐습니다.”
끄응, 신음하며 시계를 확인하자 5분 3초를 넘겼다. 일부러 초침이 보이지 않게 기울였는데 어떻게 감쪽같이 알아채는 건지. 사실 데보라 영 여사의 가슴께에는 붉고 뜨거운 심장 대신 금속제 시계가 박힌 게 아닌가.
어린 지식은 잊어도 감각은 남는다. 더듬더듬 따라가던 눈치가 속도를 내 배운 티타임은 나쁘지 않았다. 마사는 부유물이 떠다니지 않는 홍차의 맛을 알게 되었다. 데보라의 삶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데보라 안의 해답을 쥐여주었다. 카일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데보라에게 마사는 답했다. 나쁜 부모는 아이의 입으로 증명한다. 묻지 않고서 결론을 내면 안 된다, 같은.
2.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오?”
예상 외로 데보라는 마사와의 티타임을 하루의 루틴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자주 객실에 찾아오는 신부와 차를 권하는 여사 덕분에 마사는 미니 바에 차라면 모를까 술을 마시러 걸음하는 일은 줄었다. 데보라의 권유에 제대로 부응해준 셈이었다. 마사는 전보다 나은 솜씨로 차를 우려 데보라에게 검사를 받고선 물었다. 데보라는 태연했다.
“당신이랑 여기서 이러고 있다는 게 무슨 뜻이죠?”
“당신에게 득이 될 게 없는데.”
“그럼 당신은 득이 될 게 있어서 나와 차를 마시나요?”
“나는 당신이 생각하기에 실이 될 행동만 골라 하잖소.”
돌고 도는 문답 속에서 데보라는 당혹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마사가 현실에 기대없이 안주했다는 것은 이점이었다. 데보라 또한 마사가 제 말에 상처 받지 않았다는 정도는 알지만, 잘 갈린 바늘에 풍선이 퐁 터지는 기분은 형용하기 어려웠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은?”
“물론 누구든 생산적인 일을 하거나 건강을 챙기는 편이 이롭다고는 생각해요. 하지만… 그건 이로운 거고요. 당신이 선택한 삶이라면 그걸로 됐을 뿐, 내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라 생각해요. 내가 내 삶에 책임을 지려고 노력하듯.”
“당신, 변했군.”
“이상한가요? 아니, 이상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다고 했지.”
데보라가 입가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마사는 찻잔을 두 손으로 쥐고 눈을 깜박였다. 원래 데보라는 높은 자리에 우뚝 서길 바라면서도 정상 범주에서 벗어나면 큰일날 여자처럼 굴었다. 그 혼잣말이 제 심정을 정확히 대변하고 있어 마사는 어딘가 허전한 기분을 느꼈다.
이 기분은 얼마 전부터 꾸준히 이어졌다. 어느 날 오후 눈을 떠보니 몸이 술을 마셨을 때보다 서늘하게 가벼웠다. 아무런 숙취가 없었다. 화들짝 놀라 일어났지만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마사는 몇 년 전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술을 마셨고, 웬만한 다른 투숙객보다 뤼시앵과 친했다(자주 얼굴을 봤다고 친분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그러나 미니 바에 물어봐도 손님이 많다 보니 잘 기억나지 않아서요. 죄송합니다. 라는 답변만 듣고 말았다. 가끔 이상하게 브랜디 글라스가 눈에 밟혔지만, 마사는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쳐 살길 바랐던 만큼 예민한 기억을 떨쳐낼 때 행복해지리라 믿었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말한 것도 같았다. 하지만 누구에게? 정말로 잊고 나니 석연찮은 구석이 불편했지만, 더불어 남에게 낯설고 익숙한 말을 들을 때마다 관자놀이가 따끔거렸지만, 마사는 천천히 적응하기로 했다.
“맞는 말이오.”
누군가 데보라에게 그 말을 해주었든 상관없다는 투로 긍정하자 데보라의 표정이 묘하게 달라졌다. 그래도 그는 원인을 해명하지 않고 하던 말에 깔끔하게 방점을 찍었다.
“처음 질문에 대해 답하자면, 친교 활동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거… 친교 활동이었나.”
무신경하고 의아하게 답하자 다시금 그 얼굴에 파문이 인다. 네 번째인가, 마사는 속으로 횟수를 헤아렸다. 마사는 바다로 감상을 흘리고 민물만 남기는 데보라에게 진솔히 하얀 조약돌을 던지곤 했다. 데보라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
“그게 아니라면 더 적절한 단어를 제시해 주겠어요?”
오래 우물 안 개구리로 살던 마사는 골똘히 생각해도 마뜩잖은 답밖에 낼 수 없었다. 군에서 의지하던 친우는 곧 연인이었고, 랄프는 책임져야 할 아이였으며, 그렇다고 데보라는 피로 이어진 가족도 아니었다.
“잘 모르겠는데. 당신 좋을 대로 하게.”
“어떻게 부를지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데보라는 어깨를 들썩였다. 마사는 그가 무안해야 아무렇지 않은 척 으쓱한다는 것을 오래 전 눈치챘지만, 그가 괜찮지 않을 이유는 없어 죽을 맞춰주기로 한다.
“중요한 건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당신에겐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단 거겠군.”
“그렇네요. 당신에게도 문제가 되지 않는 듯 싶고.”
두 사람은 동시에 식은 홍차를 입가로 가져갔다.
3.
기억과 실패와 삶은 긴밀하게 연결된 그만의 단어였다. 그는 아버지가 부끄러웠던 만큼 초라한 자신의 흔적을 세상에서 지우고 싶어했다. 판도라의 초대장을 얻은 행운처럼, 이곳에서 그 바람은 한 줄기 현실이 되었다. 모두가 공자의 환각에서 깨어났을 때, 마사는 대공비의 부상에 자신의 몫이 있는 줄은 까맣게 잊었다. 그는 머릿속의 공백에 통증을 느끼면서도 그 행운을 서서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사는 공연의 살인을 기점으로 데보라가 이상한 여자여도 괜찮았던 이유를 되찾았다. 헤센 공자의 죽음이 방아쇠를 당겼다. 마녀가 부상을 입고 야수가 실종된 것은 머리에 담았던 묘약 덕분이기도 해, 공자의 죽음에 제가 기여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물밀듯 들어왔다. 마사는 절망하는 동시에 불쾌감을 느꼈다. 시시각각 바뀌는 요일에 꽤 많은 잔을 마시고도 데보라는 마사를 헤아려 기억을 들춰내지 않았다. 평범할 뿐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마사는 속을 꿰뚫린 기분이 들어 마음이 상했다. 그는 데보라를 연민했으면서 자신은 동정받지 않길 바랐다. 제 행복을 완벽하게 이루어줄 사람은 없는데 왜 브랜디 글라스의 모습으로는 순순히 털어놓았던지. 망각을 지켜준 데보라의 배려가 마사에게는 불행의 씨앗으로 어긋났다. 머리로는 고마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가슴에는 원망이 얹혔다. 그래도 썩 괜찮지 못할 것은 없었다. 데보라는 되려 마사에게 베풀어주었고,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다. 마사는 더욱 오래 술을 마시고 늦게 잠드는 방식으로 파동을 무마했다.
반면 규칙적인 삶은 곧 데보라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그는 여섯 시에 일어나 거울 앞에 앉았다. 빛이 들지 않는 전등을 켜는 대신 커튼을 걷고 객실을 나섰다. 시침이 네 시를 넘기자 그는 미니 바로 향하던 걸음을 멈췄다. 부두의 소동 이후로 뤼시앵은 실종되었고, 머지 않아 바에는 하루종일 불이 꺼졌다.
데보라는 홀로 애프터눈 티를 지키는 대신 마사의 방문을 두드렸다. 문제를 자각하기 전 마사는 데보라와 티타임을 나누는 습관을 공유하거나 일부러 산책을 가지 않는 이상 이 시간이면 방에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제는 과음했다. 인내의 시간이 지속되고 나서야 새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누구요?”
“데보라 영입니다.”
“……조금만 있어보시게.”
데보라가 팔짱을 끼고 검지를 두드리며 한계를 느끼던 찰나 문이 열렸다. 눈곱만 떼고 엉성하게 로우 번으로 묶은 티가 났다. 마사는 문제의 날 이후로 데보라가 다소 불편해졌지만, 더 부끄럽고 미안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아 목을 벅벅 긁고는 의자를 밀어줬다. 다기 대신 술병이 자리를 차지한 방 안을 둘러보던 데보라는 습관적으로 잔과 와인을 집는 마사의 행동에 따끔하게 잔소리를 했다. 마사는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티푸드 없이 흘러가는 대화는 꼭 누군가 의도한 것처럼 최근의 화제를 피해 평범했다. 남편이 떠난 이후로 셀러에 술이 한참 남았다거나, 마사는 데보라의 독서나 신문을 읽는 습관에 질문을 던지는 등 느즈막한 이야기가 조금씩 들이치며 밀물처럼 쌓여나갔다. 데보라의 매끄러운 화술은 배울 만도 했다. 그러나 그 대화는 묘하게 살얼음판을 걷는 구석이 있었다. 쳇바퀴처럼 그 자리에서 머물러 불안을 지울 수 있게. 아무것도 마시지 않아서 그런지 유독 마사의 목이 타들어갔다. 그래도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은 것은 마사가 본디 고저 없이 느린 사람인 덕분이었다. 마사는 어느덧 해가 기우는 바깥을 내다보았다.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군.”
“아직 공자의 일도 전말이 밝혀지지 않았으니까요.”
“당신은 무서운가.”
데보라가 지난 밤을 떠올리는지 불쾌한 안색을 띠다 고민 끝에 고개를 주억였다. 순간 마사는 미세하게 웃음이 섞인 한숨을 쉬었다. 데보라는 건초염 진단을 받고서 무서웠다고도 말했는데, 마사는 미약하게 공감해도 기자가 정제된 기사를 쓰듯 담담하게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되려 반기고 있었다. 그는 타인의 불안에 안도를 넘어 기뻐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입을 가리는 마사의 뒤로 데보라의 자기변명이 붙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마사는 그래서 반가웠다고 말할까 고민하다가 섣불리 공감하는 게 될까봐 그만두었다. 그리고 솔직해지는 대신 데보라의 감정을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깊게 가라앉힌 시간에 계속 머물러 데보라의 일정을 무례하게 낭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러 번 시신을 보고도 얼마 놀라지 않았으면서 지금은 처음으로 호텔 판도라에 온 것을 후회했다. 마사에게 충격을 주는 것들은 죽음을 넘어선 날선 감각이었다. 마사는 전쟁터의 악몽처럼 이미 잘 알고 있는 공포를 편안히 여겼지만, 예측할 수 없는 불안 앞에서는 데보라만큼 약해졌다.
부정적인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시기는 지났다. 그러나 마사는 잠시나마 브랜디 글라스의 변신을 잊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똑같은 삶을 되풀이하여 살지 못하게 된 지금 당신은 아직도 나처럼 얼토당토 않았던 시간에 의미를 두고 있을까. 입밖으로 내어 인정하면 당신은 내 그릇된 회한을 눈치챌까. 계속 그 일이 없었던 것처럼 굴어달라고 부탁한다면 의심 없이 들어줄까. 사실 완전히 행복해지지 못해도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길 바란다고 말하면 당신에게 내가 주었던 연민을 되돌려받게 될까. 그건 싫었다. 마사는 허공에 질문을 던지다, 아무렇지 않게 대꾸한 제 말에 긴장했던 데보라의 마음을 이해했다.
호텔에서의 삶이 영영 끝나지 않을 것처럼 시간이 지나칠 정도로 느리게 흐른다. 마사는 고민을 입밖으로 내어 잘 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손을 만지작거리며 평형을 유지하곤 맞장구를 쳤다.
“물론 그랬겠지. 나 또한 다를 바 없소.”
데보라를 안심시키기에는 적절한 답안이었다. 대화는 거미줄처럼 끊길 듯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친교 활동의 견고한 틀을 유지하면서도 지금의 사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