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논증
2021. 5. 1.

 

간접 논증
間接 ‘論症’

 



1.


  1851년 12월 2일 오전 6시, 파리의 성벽에는 선언문 한 장이 걸렸다.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국회를 해산했다. 국민의 이름을 빌려 참정권을 재수립하겠다는 의도였다. 이미 전년 국가원수의 연임을 위한 헌법 개정 투표가 이루어졌지만, 정확히 278표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과반수에 다다르지 않아도 사분의 일 이상은 차지하는 인원. 프랑스의 국민에 비하면 적었다. 그러나 가결을 내리지 못한 우두머리는 그 삼백 명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굴복하는 대신 피의 박애를 나누기로 결심했다.
  자비에르 토르티에는 프랑스의 자랑스러운 헌병 중장이었다. 아랫사람에게 엄격하고 날카로웠으며 국가의 뜨거운 맥박에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었다. 허나 그는 사십 대에 들어서며 외나무다리를 걸었다. 사실 자비에르는 초라한 남자였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어깨에 별을 달았지만, 누구보다도 헌병이 적성에 맞지 않아 속내를 깎았다. 물러진 성정은 그의 마음을 형식적으로 위로해주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받았다. 그 다행은 미래의 나폴레옹 3세에게 저항할 공화당이었다는 불행으로 되돌아왔다.  
  3일의 이른 새벽, 시종들도 잠들었을 참 마사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깼다. 어머니가 바쁘게 보석함을 열고 닫으며 보이는 패물은 죄다 담고 있었다.

  “……뭐야. 어머니?”
  “마사. 짐을 챙겨라. 필요한 것만 간소하게.”
  “왜? 무슨 일인데요.”
  “파리를 떠날 거다. 샤르보뉴 대령님께서 도와주신다니 망정이지.”

  마사는 배를 타고 나서야 아버지의 친우 대부분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다에서 자본 건 처음이었다. 겨우 가져온 짐가방 몇 개에는 쉽게 잊어버릴 것들이 담겨 있었다. 작은 새 모양의 목각 인형, 2년 전 생일에 받은 회중시계, 짐칸에서 몰래 트렁크를 열어 잊은 것을 세던 마사는 어머니의 치맛폭에 얼굴을 묻고 숨죽여 울었다. 항해는 선고였다. 
  토르티에가 사형 당하는 순간 호프먼은 태어났다. 손님을 대접할 응접실도, 한 바퀴 돌아 오르는 넓다란 계단도 없는 낮은 울타리의 집에서 마사는 괴리감을 느꼈다. 아버지는 해묵은 번데기의 허물을 벗어 후련한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순순히 농사를 배웠다. 물 한 방울 손에 대보지 않은 그들은 고국에서 이방인이었던 대로 잉글랜드에 생각보다 손쉽게 스며들었다. 마사는 고루한 기분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식탁에 고기가 없는 날이 더 많았다. 제자리를 맴도는 것보다 변하는 게 어려웠다. 현상을 유지하지 못한 자비에르가 한심했다.
  고즈넉한 펜잔스에 다다르고서 마사는 봉사자로 지냈다. 부모의 몰락한 가난에, 아이들에게 돌을 맞던 마을의 어수룩한 청년에게, 주로 얌전한 고양이를 가장해 방관하고 가끔은 나서면서. 공연히 겉돌던 남자가 찰싹 붙어다닐 정도로 완전히 안정을 내어줬을 즈음 마사는 권태로 켜켜이 쌓인 심통에 응당 가져야 했던 것을 돌려 받고 싶었다. 아버지가 실패한 방식으로. 프레데릭의 청혼을 거절한 날 마사는 세 사람이 나란히 둘러앉은 식탁에서 말했다.

  “나, 군인이 될 건데요.”

 

 

 

2.


  “사랑을 해본 적 있습니까?”
  “해본 적 있소.”
  “상대가 당신과 같은 마음이란 걸, 당신을 배신하지 않으리란 걸 어떻게 믿었죠?”
  “하지만 사랑이 꼭 같은 마음이어야 하오?” 취기가 오른 질문에 반문한 마사는 장미의 가시를 쓰다듬듯 손마디를 매만졌다.
  “그 사람이라면 나를 배신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거요.”
  “그리 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니, 부럽군요.”

 

 

 

3.


  마사는 훈련생이 되고 나서 가장 먼저 포기하는 법을 배웠다. 동등한 지위로서의 대우를 기대하는 것은 사치였다. 그러나 마사는 일찍이 내려둔 만큼 언젠가 우두머리에 올랐을 자신을 그려보았다. 비좁은 틈에서 웅크려 잠드느라 등이 굽어가는 와중에도 자신은 틀리지 않아야 했다. 항상 변화와 실천은 어려운 법이다.
  다디단 사탕과 화사한 꽃에서 빳빳한 군복과 포만감이 느껴질 음식으로, 그 다음은 평범한 신혼생활로. 마사는 주름 하나에 단념 하나를 심었다. 하지만 군인으로서의 자존심은 마지막까지 꺾지 못했다.
  칠 년 전 어느 때, 마사는 그의 배우자와 싸웠다. 그들은 그럴 듯한 반지 대신 칼로 왼손 약지를 그었고, 한 침대에서 잠드는 대신 각자의 자리를 지켰다. 두 사람에게는 아쉬움도 불만도 없었다. 바라는 방식이 같아 평생을 약속했으니까. 마사의 배우자는 곧 마사의 동반자였다. 그는 남이 침을 뱉든 말든 서글서글하게 어깨에 팔을 걸고 ‘다음에 봅시다.’, 한마디를 꼭 덧붙인 다음에야 떨어지던 사람이었다. 그 말에 ‘그러시오.’ 하고 돌려주면 꼭 영원히 군인으로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아쉬운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마사에게 조금 더 머리를 조아리면 훨씬 진급하기 쉬웠을 거라 말했다. 마사는 상처 받았다. 당시 마사는 아유브 칸을 끌어내리기 위한 행군에서 약탈을 금해달라 몇 가지 이의를 제기했는데, 빠짐없이 기각당했다. 강성한 군의 체계를 두고 과거의 굴욕적인 패배─몇십 년 전 아프가니스탄에게 참패한─를 밑거름 삼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대령의 지론 때문이었다. 대령의 직속 하관이던 그는 마사를 다독였지만 완벽히 품어줄 수는 없었다. 

  “내가 나약해졌다고 생각하는 거요?”
  “아니, 당신은 그 반대지. 오히려 대담해진 편일세.”
  “……음.”
  “마사.”
  “그런데 내 틈을 지적하고 있잖나.”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아니라면 맞는 건 뭔가?”
  “당신, 그만 좀 하게.”

  1880년은 승리를 목전에 두었다 말하기에는 거리가 있는 해였다. 지친 그는 목이 말라 수통을 쥐는 대신 마사의 손을 잡았다. 마사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발코를 보았다. 서로 그른 곳에 원망을 돌릴 뻔했다는 사실에 아연해졌지만, 대위는 가끔 솔직하지 못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한 만큼 그들은 조용히 싸우고 화해하길 반복했지만, 두 사람은 전쟁 통에 오래 지쳐 있었다. 혀를 잘근거리던 차 상대가 일어났다. 얼굴은 평온했지만 마사가 보기에는 고독을 겨우 미소로 눌러 참는 낯빛이었다.

  “당신을 나무라려던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네. 흘려들어도 좋은 이야기요.”
  “…….”
  “그러니까 잘 추스르고. 난 슬슬 대령님이 부를 때가 돼서 가봐야 해요. 다음에 봅시다.”

  마사는 그러시오, 하고 대답하는 대신 외로움에 목젖을 간질이는 변명을 삼켰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늦은 기회마저 잃었다.

 

 

 


4.


  탕.
  탕.

  총성이 들렸다. 마사는 파드득 고개를 흔들어 잠 기운을 떨쳐냈다. 총성이 아닌 노크였다는 사실에 마사는 옆구리에 손을 문질러 닦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누구도 들이지 않았던 방 안에 인영이 아롱거렸다. 어젯밤 총지배인이 유리정원의 모종에 실수가 있었다 밝혔지만, 마사에게는 강도만 줄어들 일이었다.
  마사 호프먼에게는 이미 상흔이 내밀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위스키를 오래 마셔 취기가 심하게 돌면 제자리에 있는 법이 없었다. 방 안에 앉아있는 사람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되었기 때문이다. 맞은편 의자에 앉아 손을 내미는 그림자가 지면, 마사는 항상 산책을 나섰었다.
  되려 그 사악한 환상을 반기고 있었다는 점은 그나마 위안이었다. 마사는 오래도록 정체되어 지내면서도 살아있길 바랐다. 굴곡 없는 삶에 충격을 주려면 과거에서 기억을 끄집어내야 했다. 과거의 환청이 그랬고, 지금의 총성이 그랬다.
  선객은 이미 풀어둔 잠금쇠를 밀고 들어왔다. 마사는 그가 챙겨온 주전부리를 내리는 동안 안도한다. 비록 죄악감이 발목을 쥐고 수면 아래로 끌어내려도 더이상 불쾌할 일은 없다는 확신 때문이다. 악몽은 똬리를 튼다. 그에게 표면적인 도태란 가장 끔찍한 벌이었다. 만찬 날, 마사는 한참 사람들의 폭동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연회장에 머무르는 과반수의 사람들은 넘어지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달려나갔다. 그들은 총과 창을 들고 싸우는 것 같았다. 나중에 그 사람들이 망상에 저항하는 정당방위를 행사했다는 걸 알았지만, 그때 마사는 투쟁할 수 없이 구멍난 군인이라는 데 패배감을 느꼈다. 결국 그는 고고한 카나리아와 같은 인형사를 동경하고 자신을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우연한 망상을 얻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지팡이를 부러질 듯이 쥐고, 의자를 발로 걷어차서.
  적어도 꿈은 그럴 일이 없다. 마사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다음에야 이 객실 안에 두 사람이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남자는 이 퇴역 군인이 번거롭고 느긋하게 굴든 말든 괜찮은지 조용히 말을 고를 줄 알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마사의 갑갑한 태도를 때로는 편안히 여겼다. 자신이 이곳에서 어떤 선을 문질러 지우든 마사에게는 불편할 것이 없다는 반증이었으므로. 그것이 머무를 자리만 내어주는 387호에 자주 발을 들이는 이유일 지도 모른다.
  그는 거짓 어린 변명은 못해도 정성은 다할 줄 알아 빈손으로 오는 날이 없었다. 물의 생명력에도 시간에 닳아 시들어가는 꽃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들고 온 튤립을 모셔만 둔다. 

  “꽃병에 이미 주인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자네가 두고 간 게 아니었나보군.”
  “다음 방문할 때 들고 올 생각이긴 했지만요. 선수를 빼앗긴 모양입니다. 보기 흔한 꽃이라 미뤄두었는데…….”

  언제부턴가 그 손님은 마사를 꼬박꼬박 선생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마사가 한 번은 호칭을 정정했을 법도 한데 과연 실행에 옮겼는지 가물했고, 아벨은 원래부터 그랬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순간 관자놀이가 따끔해 잔상이 남았다. 아벨이 본디 그은 선을 넘을 정도로 가까운 위치─꼭 마사가 물건이라도 된 것처럼─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파편이었다. 얼마 전 숙취 없이 일어났을 때부터 어딘가 허전했다.
  사실 마사는 신도가 될 수 없다 못박은 자신에게도 유독 정중했던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어떻게든 회유할 수 있을 거라 믿었는지 찾아오기에 기대는 무산되리라 말해주려 했지만, 그 말은 아벨이 찾아오는 빈도에 가로막혔다. 그는 제 객실이 물바다요 이 안에서만 입을 뻐끔거릴 수 있던 물고기인 것마냥 387호실을 찾았다. 하루는 아벨이 마사의 잔을 채워주던 사이 물었다. 원래 이렇게 사람 만나길 좋아하나. 꼭 그렇지는 않지요. 결국 의심을 미루어두고 나서야 그의 손에 들린 꽃이 기껍게 보였다. 가끔은 왜 이렇게 해주느냐고 묻고 싶어도 정작 답을 듣기 싫어 메인 목에 위스키만 들이부었다. 인제 화병에 바뀌어 놓이는 꽃은 누구와 자신을 겸하지 않고 꺾인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꽃봉오리가 펴진 것을 골라 갈무리하는 과정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 투자되었다. 온전한 마사의 것. 387호실에 놓이지 않는다면 쓰임새를 잃을 꽃 몇 송이. 아벨은 그것이 마사에게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는 걸 증명하듯 잠시 정원에서 빌려왔다 했지만, 마사는 용케 그 줄기를 꺾어온 것이라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가질 수 없던 것이 가지고 있는 것의 선을 넘나들었다. 
  이리도 쉽게 이슬에서 가시로 변할 수가 있는지. 마사의 명치께가 서늘하게 식었다. 노인은 남의 꽃에는 관심이 없다. 이 출처 모를 장미는 이 사람이 준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을 추측하는 대화에 건성으로 대꾸하다가, 마사는 꽃의 생마저 귀이 여길 성직자에게 넘긴다.

  “자네가 가져가게. 난 꽃에는 관심이 없으니.”

  내가 가지면 안 될 것을 쥐고 있지 않겠다. 자네가 정성으로 부여한 자격이 깃든 물건은 받겠다. 꽃이든 청포도든 증명할 수만 있다면. 조심스럽고 미숙하게 아벨이 장미를 갈무리하는 동안 마사는 어렴풋이 지론을 다진다.

 

 

 

5.


  “자네 말에 꼬박꼬박 일러줬으니 내 말에도 답해줄 텐가.”
  “무언데 그러십니까?”
  “남을 위로해본 적 있소?”
  “그야 당연히…….”
  “…….”
  “모르겠어요. 난 위로랍시고 한 말들이, 당사자에게는 다르게 들렸을지도요.”
  “역시 주의하는 수밖에 없겠군.”
  “당신도 위로가 필요합니까?”
  “당신도?” 끝에 악센트가 실린다.
  “어흠.” 베누스가 딴청을 피우며 술잔을 채우는 동안 마사는 한 번 넘어가줄지 말지 고민했다.
  “예전에야 필요했지 지금은 아니오.”
  “…흠. 그러니까, 그냥. 다시 필요해진다면 놀러와도 됩니다. 382호실이거든요. 이래뵈도 입에 발린 말 하나는 잘하고.”
  “참나. 이 양반 술 좀 하는 줄 알았더니 맛이 갔구먼. 수작이라면 이십 년 늦었수.”
  “하하하…….”
  “됐네, 여하튼 나중에.”

 

 

 

6.


  아벨과 마사는 멀리서 바다를 볼 시간만 정해두었다. 약속 장소는 자연스럽게도 387호실 앞이었다. 같이 가자고 선뜻 제안한 것과 반대로 아벨은 마사를 데리러 왔다. 부두에서 공연을 감상하기로 했지만 두 사람의 옷차림에는 다를 게 없었다. 아벨의 수단은 본디 단정했고, 마사는 공연보다는 사람에 의미를 두었다. 아벨이 에스코트를 청했지만 마사는 상대를 민망하게 만들더라도 사양했다. 이제 끝이 접힌 분홍색 튤립만큼이나 새삼스럽다.
  아벨은 마사가 지팡이를 짚지 않은 왼편에서 걸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미로 같은 정원을 한 바퀴 돌았다. 누군가 바다로 갈 시간을 미루려는 의도였고, 반대는 순순히 동의했다. 목이 남은 희고 붉은 장미가 달빛에 명암만 보였다. 마사는 뒷짐을 지고 걷다가 잘못 튀어나온 돌멩이에 넘어질 뻔했다. 아벨이 팔을 붙들었다가 멋쩍게 놓았다. 이 무뚝뚝한 노인은 감사 인사 대신 동행인의 팔꿈치를 붙들어 제대로 된 지지대로 삼았다. 아벨은 첫 번째 거절을 잊은 듯 옅게 미소지었다.
  카를 공자가 부른 유람선은 촘촘히 빚은 장식이 자리한 무대를 얹었다. 마사는 그 규모에 카를 막시밀리안이 체면치레를 중시하는 양반이라는 판단을 굳혔다. 이는 꼿꼿한 무릎을 굽히지 않는 값이다. 아벨은 판도라의 뒷편에 시선을 주었다. 하얀 튜닉이 깃털처럼 살랑거리는 무용수였다. 마사는 주위를 둘러보며 관현악단을 찾았지만, 금세 같은 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마사는 팔로 눈을 비볐다.


  “선생님?”
  “어두워서 영 초점이 맞질 않는군.”
  “그렇지 않습니다. 무용수 말씀이신가요.”
  “그래.”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아벨은 눈을 깜박였다. 마사는 다시 군무에 집중했다. 토슈즈가 재차 나타났다가 흙먼지가 일듯 부옇게 사라졌다. 전장이었다면 이 사이에 적이 숨었을 텐데. 마사는 눈살을 찌푸리고 몸을 돌렸다. 아벨이 발레보다는 오케스트라에 관심을 둔 것은 적절한 핑계였다.
  부둣가에서는 소금 섞인 바람 냄새가 났다. 마사는 어딘가로 떠날 때마다 이 바람을 맞아보았다. 파리에서 펜잔스로. 펜잔스에서 전쟁터로. 빳빳한 옷 아래로 스미는 한기에 마사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곁에 있어 주신다면, 좀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아벨은 마사에게 닻줄을 내리기로 그리 약조하고도 작은 움직임에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남을 걱정한다기보다는 긴장을 곤두세운 눈치다. 

  “말이 다른 것 같소만.”
  “한결 나았습니다.”
  “아벨. 대강 넘겨짚는 것이니 새겨듣지 않아도 되네.”

 

  위로라. 마사는 베누스에게 묻고도 그 몇 음절의 단어를 온전히 소화할 길을 찾지 못했다. 초대에 응하지 못할 이유를 묻자 시기를 고르던 끝에 물을 꺼린다는 답만 겨우 내어두던 아벨에게는 미약한 필요를 실감하면서도. 밟아본 적 있는 땅도 헤아리지 못한 마사는 팔딱이는 심장의 반절을 동쪽 끝에 두고 온 그를 구하지 않는다. 대속하지 않는 대신 혈을 잇는다. 고향 물 건너에서 성사된 만남은 실마리를 휘어잡기에 헛되지 않았다. 한결 대담해지면 존경할 이유조차 사그라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네는 조국에 사람만 두고 온 겐가.
  “네?”
  “아니었겠지. 이름을 버리고 빈 자리를 물로 채우다 두려움까지 스몄겠지. 나 또한 다르지 않다오.”
  “물을 두려워하십니까?”
  “아니. 이름을 한 번 버렸소.”
  “아는 사람이 아예 없진 않았겠지요.”
  “하지만 있어도 아마 상관없네. 나는 간직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게 자네와 내 차이일세.”
  “잊어도 괜찮을까요.”
  “갑판에 오르지 못할 바에야.”

  악단이 리허설을 시작하자 아벨이 호흡을 멈췄다.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는 연주자들이 부드럽게 현 위에 활을 그어내렸다. 가끔 파도가 피아노보다 더 크게 철썩였다. 지금까지의 허구에 신부가 한마디 반박조차 없던 것은 다행 중 불행이다.

  “기억이 참회라면 휴식은 도약일세. 자네는 고해실 바깥에서도 부질없는 대속을 하지 않던가. 다른 것으로 채우게.”
  “이를 테면요?”
  “자네가 나한테 그래줬듯이. 튤립 대신 장미라든가.”

  신은 짐을 나누어 지라 했지 혼자 떠받들라 한 적 없다. 아벨은 느리게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부정하는 대신 팔을 풀고 마사의 손을 쥐었다. 마사는 모른 척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쥐는 손끝이 차도 떨지 않는 데 미세한 노력을 발휘했다. 피콜로의 꾀꼬리 같은 음색이 드문드문 청명했다. 

  “역시 멀어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군요.”
  “가까웠다면 달랐을 테요.”
  “한 걸음이라도 차이가 있을까요.”
  “분명히.”

  아벨은 결심했고 마사는 묵언으로 지지해주었다. 그 작은 용기가 값어치 없는 죄를 덜어내리라. 마사는 발치 아래로 들이찼다 물러가는 물살을 내려다보며 바람 빠지듯 웃었다. 못한 말이 있다. 사실, 나도 물이 무서웠다. 섣부른 추측은 동일한 두려움의 원천에서 기인한다. 동질감이다.
  아벨은 그저 바다와 한 발짝 더 가까운 거리에서 빙긋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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