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하여 장미
2021. 4. 30.

 

 

  호텔 판도라는 견고했지만 그만큼 더럽혀지기도 쉬웠다. 만찬 다음 날 낮, 호텔은 고요했다. 제대로 악몽을 꿨다면 객실에서 문을 걸어잠그고 있는 게 정상일 테다. 반대로 마사는 그 조용함을 빌미로 방을 나섰다. 미니 바에서 술을 직접 골라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제시 위젠필드에게 안내 받은 길은 선명했고 바텐더 뤼시앵은 잠시 자리를 비웠는지 아무도 없었다. 마사는 값비싼 상표가 붙은 와인 한 병을 따고 두리번거렸다. 전날 미니 바에 식전 파이를 먹으러 몰려들었던 인파를 생각하면 주정뱅이가 한둘은 아닌 게 분명한데, 지금은 사람이 곧 해악이었다. 오래 걷고 싶지 않았던 마사는 바로 옆의 휴게실을 골랐다. 거기서 거기겠지만 적어도 바람이 드는 곳이다. 목적지를 정하고 갈증에 목부터 축이던 사이, 저 멀리서 정적인 걸음이 가까워졌다. 그는 정중하게 묻는다.

“실례지만 손수건을 빌릴 수 있겠습니까?”
“손수건은 없소.”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는 미미하게 난처한 기색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텅 비었다. 마사는 입에서 병을 떼고 앞의 청년을 훑었다. 한 손은 가지런한데 반대는 애매하게 들고 있어 걸음걸이가 어긋난다. 그 위에서 비린 혈향이 훅 끼쳤다. 엄지와 검지를 잇는 둥그런 살이 찢어져 손목의 안쪽으로 피가 타고 흘렀다. 깊게 찔려 벌어진 상처라는 판단이 서자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나 그는 긴 속눈썹으로 그림자가 진 눈을 깜박이며 음식을 흘린 것처럼 굴었다.
  마사는 선 밖의 일에 무감했다. 이를 테면 환각 사이로 멱살을 구르고 주먹질을 하는 사내들을 피해 갈 길을 간다는 것이다. 남에게 선행을 베풀지 않는 자는 그만큼 돌려받지 못한다지만 처음부터 받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먼 세상의 이야기였다. 다만 한 가지 그가 드물게 지나치지 못하는 상황이 있었으니 타인 없이 홀로 된 자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성인 남성이 아니었을 때였다.

  “왜 손수건이어야 하는 거요?”
  “닦을 만한 것으로는 가장 적절해보였기 때문입니다.”
  “파상풍에 대한 수칙도 알고 있소?”
  “물론입니다. 헌데…….”
  “그런 작자가 물보다 수건을 먼저 찾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마사는 병의 목을 쥐고 퉁명스럽게 휴게실로 들어섰다. 카미유는 얼떨결에 뒤를 따라왔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멈추었다. 눈앞의 노인이 너울거리는 커튼을 단단히 쥐고 찢어버렸기 때문이다. 곧 환자는 마사가 발로 밀어둔 의자에 마주 앉아 손짓대로 조용히 상처를 내밀었다. 마사는 바닥이 젖든 말든 포도주를 부어주었다. 일부러 비싼 것으로 골라왔건만.

  “턱이 뒤틀리고 싶어 작정한 게 아니라면 신경 좀 쓰시오.”
  “주의하겠습니다. 이제 감으면 되는 겁니까?”
  “흠. 한 번 해보시게.”

  흐르는 것을 닦는 동안 상대의 답변이 미세하게 한 발 늦는다. 마사는 얇다란 커튼을 이로 물고 끄트머리를 잘게 뜯고서 카미유에게 내밀었다. 그는 다리로 손을 받치고 붕대를 올려두었지만 남은 건 한 손뿐이었다. 결국 군화 끈을 묶듯 울컥 힘을 주어 상처를 동여매는 순간 마사는 괴고 있던 턱에서 손을 떼고 단단한 팔뚝을 붙잡았다.
  도로 살점이 덜렁거리는 위부터 헐겁게 감아나가는 동안 몇 번의 질문이 오갔다. 마사는 성실하고 간결한 답변을 통해 그가 불행하게도 유리에 베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깊은 사유를 묻지 않아도 하기사 호텔 판도라는 햇빛이 잘 들게 유리창을 훌륭하게 배치해두었고, 그렇지 않아도 아수라장이 된 현재 유리로 된 물건 하나가 깨지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꿰매야 할 상처요. 며칠간은 두꺼운 천이나 꽉 묶는 것도 엄금일세.”

  미리 갈라둔 끝을 매듭지으며 마사가 덧붙이자, 카미유는 처치가 된 손을 뒤집어 한참 바라보다가 물었다.

  “마담, 군에서 간호사로 일하신 적 있습니까.”
  “한때는. 반대로 치료를 받는 쪽이기도 했소.”
  “그렇군요.”

  맹금을 닮은 호박색 눈이 집요하게 빛나는 것도 같았다. 대수롭지 않은 답변이었지만, 마사는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카미유 크리스티앙-클로에 샤르보뉴 대위는 그린 듯한 군인의 표본이었다. 그는 연로한 퇴역군인에게 정중했고 자신에게 까다로웠다. 그리고 한 수 앞의 미래를 내다보며 제 상처를 남겨두지 않았는데, 그 완고함은 카미유가 마사와 자주 말을 트는 계기가 되었다.
  아테나가 카미유를 수호한다면 그를 비바 갈레타에 데려다 두었을 뿐 아니라 마사와 마주치게 하는 데에도 그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마사는 자신을 보고 우뚝 굳었다가 반가운 기색으로 부쩍 다가오는 카미유를 보며 의아함을 감췄다. 세 번째 만남이었다.

  “또 뵙습니다.”
  “오랜만이라고 할 수가 없군.”
  “그렇겠군요. 이 또한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낯빛은 누구보다도 어색해서 부족한 사회성을 최대치로 끌어내는 것이 보였다. 마사는 그 노력이 가상해서 옆자리를 내어주었다. 카미유는 꾸벅 앉아 주머니를 뒤적였다. 이 상황에서도 가지런하게 넘긴 머리가 반지르르했다. 그 꼴이 새까만 털에 윤기가 흐르는 강아지를 닮았다.

  “이번에도 감아줘야겠소?”
  “송구스럽지만 오늘은 조금 더 큽니다.”

  무명실과 휘어진 바늘, 그리고 갈색 병 하나가 손에 딸려나온다. 오랜만에 마사의 등골이 서늘했다.

  “난 의사가 아니오.”
  “의료 시설은 있었는데 의사는 없었습니다. 부탁드릴 만한 분은 한 분밖에 없더군요.”
  “……음.”
  “짐을 드리려고 한 말은 아닙니다. 거절해주셔도 괜찮습니다.”

  그 말이 더 부담스러운 줄은 모르는 건가? 마사는 표정으로 물었다. 바늘을 구해달라 요구하지 않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제일 오래 본 건 자신이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그 손을 여러 번 꿰매기도 했다. 그러나 피 위에 난 목숨은 남의 것을 업기에 가늘고 무책임하다.
  카미유도 마사의 침묵에 담긴 의미를 짐작하며 순순히 입을 뗀다.

  “제가 직접 해보겠습니다. 지켜만 봐주십시오.”
  “아니, 됐네.”

  생각보다 말이 빠른 적이 얼마나 있었던지. 샤르보뉴 대위는 강직한 만큼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다. 마사는 경험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고 결론지으며 일어섰다.
  집행은 샤르보뉴 대위의 객실에서 이루어졌다. 황산 에테르도 클로로포름도 없었으므로 카미유는 어쩌면 대위의 자리에 오르려 애를 쓴 만큼 인내해야 했다. 마사는 티테이블에 위스키 병을 올려두었다.

  “실력은 보장 못하니 마시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걸세.”

  바늘을 조명에 비추어 손수건으로 닦아낸 다음 실을 끼운다. 카미유가 커프스 버튼을 풀고 소매를 걷는 동안 마사의 귀는 따가웠다. 누구도 살리지 못한 마사 호프먼 중위. 고개를 떨군 마사의 손끝이 떨린다. 어느새 반 병을 비운 군인이 물었다.

  “마담. 괜찮으십니까?”
  “나도 한 모금은 마셔야겠군.”

  한 모금 치고는 호흡이 길다. 남은 것의 반절을 마시고 손을 움켜쥐었다가 펴자 한결 낫다. 가볍고도 깊은 한숨을 쉰 다음에야 자세를 가다듬었다. 카미유가 지시대로 테이블에 손을 올리자 마사는 의자를 끌어 앉았다. 수술대 대신 테이블, 의사 대신 간호사라니 아연하다.
  잘 갈린 바늘은 달랑거리는 살을 뚫고 잇는다. 샤르보뉴 대위는 가볍게 신음했으나 금세 적응한다. 마사는 자꾸만 흐려지는 눈 때문에 몇 번이나 팔로 얼굴을 문질러야 했다. 한마디라도 끄집어내는 순간 목구멍에서부터 손은 진동할 테니 정적만이 감돈다. 한 땀에 잃어버린 사람들을, 한 땀에 자신 대신 살아갈 사람들을 지워내야 했다. 카미유는 끈질기게도 마사가 가위로 매듭의 길이를 줄이고 허락한 뒤에야 입을 뗀다.

 

  “다 되었군요. 감사드립니다.”
  “더이상 손대지 않을 거요.”
  “실밥은 제가 풀어도 괜찮겠습니까.”
  “……아.”

이마의 땀을 훔치던 카미유가 마사를 보며 옅게 미소지었다. 마사는 멍하게 벌어진 입술을 다물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것까지만이오. 그러나 마사는 카미유의 군화 밑창이 예민한 선을 문질러 허물었다는 것은 얼추 알았다.

 

 

 


  이름에는 힘이 있다. 그 뒤에 따라붙는 호칭에도. 마사는 스스로를 카미유 크리스티앙-클로에 샤르보뉴 대위라 소개하는 그를 보고서 심장이 따끔했다. 샤르보뉴 대위. 그렇게 불리는 것이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마사 호프먼이오. 잃어버린 대위라거나 지금 남은 중위라는 이름은 붙이지 않는다. 그는 머지 않아 함구했다. 마담.
  카미유는 작은 수술에서 인내하는 버릇이 들었으나 착란의 공포는 그 곧은 사람마저도 집어삼키는지. 다음의 만남에서 마사는 그를 두 번 호명해 깨운다. 처음은 다른 이들이 지나다니는 복도에서다. 그는 의자에 앉아 코트 안자락에 손을 댄 채 무어라 중얼거렸다. 마사는 아물어가는 상처에 한 번, 그를 한 번 확인하곤 어깨를 흔들었다.

  “샤르보뉴 대위.”

  일어나시오. 뒤늦게 놀란 카미유의 겉옷 아래로 리볼버 한 자루가 떨어졌다. 탄환이 없는지 소리가 가볍다. 주워들어 갈무리하는 동안 총신에 적힌 이름 하나가 읽힌다. 엠마누엘 크리스티앙 샤르보뉴. 어딘가 익숙한 글자가 감춰진다.

  “마담.”
  “누가 자네에게 말을 걸던가.”

  잠들지 않아도 드리우는 꿈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기로 유명했기에 카미유는 한참 말을 고르다가 답했다.

  “그저 군인이라면 필히 지고 가야 할 숙명입니다. 헌병과 육군에 무관하게도요. 마담께서도 아시겠지요.”
  “어느 정도는.”

  위선자라느니, 입에 담는 여자아이의 이름까지 돌이키면 그런 게 아닌 것 같아보였지만. 마사는 이미 그에게 내어주기로 한 것이 많아 구태여 묻지 않고 수마에서 깨어난 안색만 훑는다.

  “마담께서는 이런 걸 보시지 않으십니까.”
  “가끔은 봐도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이오.”

  카미유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싶더니 진중한 얼굴로 결심했다.

  “제가 그리 믿음직스럽지 않아 보이겠지만, 마담께서도 털어놓고 싶으신 게 있다면 제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내가 부르기 전까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말하는 거요?”
  “……?”
  “자네는 이러고 있을 바에 들어가서 눈이나 붙이게.”

  단칼에 어깨를 두드리고 무신경하게 자리를 뜨자, 카미유는 그 뒤에 대고 멀뚱멀뚱 뒷목을 매만지며 중얼거린다.

  “저, 괜찮습니다만…….”

 

 

 

  두 번째는 한밤중의 테라스. 낮의 백일몽이 밤의 악몽으로 교체된 지금 그는 한가로이 궐련을 피우며 공통된 화제를 입에 올렸다. 마사는 방에 놓인 장미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여러 사람에게 동시다발적으로 꽃이 주어졌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사과의 선물이었다면 선상 입장권과 함께 쥐여줬을 걸세.”
  “지금으로서는 출처를 파악할 길이 없군요.”
  “그래. 자네는 알아볼 생각인가.”
  “…….”

  카미유는 몇 모금 빨지도 않고 멍하니 판도라의 바깥을 응시한다. 그 눈은 조금도 빛나지 않고 침잠한다. 마사는 장미의 이야기도 잊고서 타들어가는 담배를 보며 카미유에게 의지하지 않았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한다. 어차피 돌아오든 말든 제 장미는 같은 층의 다른 곳에 꽂혀 있을 테니 중요한 대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샤르보뉴 대위. 입 안에서 그 몇 음절이 맴돈다. 용광로에서 홀로 들끓다 두드려 굳어질 그는 혼란에 빠진 사람들에게 믿음직했으나 마사는 그의 낮은 침음성에서 두드러진 금을 보았다. 불신하는 이유와 허락하는 이유가 같다. 보호받지 않을 이유는 곧 그가 도움 받아야 할 이유와 나란하다. 마사는 최대한 건조하게 호명한다.

  “샤르보뉴 대위.”

  알싸한 향이 그 실밥을 태울 지도 모르는 일이니.

  “정신 차리지 않으면 조만간 담배꽁초가 대위의 손가락 끝을 태워 먹을 것 같소.”

  다시, 발을 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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