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
“뭐요.”
“지금부터 제가 오른쪽으로 도망칠 텐데.”
“달려오는 걸 보니 그러는 편이 그쪽에겐 좋겠군.”
“왼쪽으로 갔다고 해주시겠습니까?”
“내가 무엇하러?”
다른 것을 차치하고 중요한 것만 떼어 말하자면, 마사는 이튿날 잠에서 깨는 순간 깔끔하게 브랜디 글라스의 기억을 잊었다. 거대한 마법에서 풀려날 방법을 찾으러 주방에 갔다가 촛대와 자명종에게서 구해졌다는 것도. 보통은, 사실 브랜디글라스와 촛대가 되는 건 보통인 일이 아니지만, 은혜를 모르고 양심마저 없는 사람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마사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나이였다.
루시엔은 난간에 기대어 태평하게 에그타르트를 가장자리부터 먹다가 이 사단을 냈다. 호텔 판도라의 명성에 알맞게 황금으로 쌓아올린 듯한 에그타르트의 필링은 얍삽하게 포크와 이산해 제자의 뺨을 철퍽 스치고 말았다. 그는 멱살을 잡힌 기억을 되새기며 위기감을 느끼고 줄행랑을 칠 준비를 마쳤다. 마사에게 루시엔은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일에 집착하는 한량에 불과해서 얼마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사실 그렇게 부탁하지만 않았더라도 알아서 모른 척 해줬을 텐데. 지금까지 혀를 놀려 거리감을 운운하는 능숙한 태가 마사에게는 오히려 벽을 세우는 이유가 되었다.
그는 나름의 연장자이자 기억을 잃은 상대인 마사에게 예를 차릴 줄 아는 신사였기에, 원망을 대신해 한껏 섭섭한 얼굴을 하고서 3층 계단으로 피신했다.
머지 않아 루카스가 씩씩거리며 계단을 뛰어올랐다. 검은 재킷의 가슴팍까지 은빛으로 수놓은 설탕과 노란 커스터드 크림은 볼 만했다. 그는 화를 삭이지 못해 두리번거리다가 뒤늦게 마사와 눈이 마주쳤다. 일순 그의 몸이 굳었다.
“대위님?”
“그래.”
“혹시, 여기에 있던 남자 하나 못 보셨습니까?”
“무슨 일인가?”
“그 인간이 수작질을 부려서…… 아니, 부렸습니다.”
“자네의 뺨이 그 증거겠군.”
“예.”
루카스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도 자신의 앞에서는 겨우 고분고분한 태세를 보이자 마사는 로비홀의 시계를 내다보며 말을 붙였다.
“자네는 처음에 날 모르는 척 하려고 했지.”
“그 이야긴… 대위님, 말씀 드렸잖습니까. 당황했을 뿐입니다.”
“여기에 있던 누가 일장연설을 하더군.”
“뭐라고 말입니까?”
“알고 있는 사람을 모른 척 하면서 피하는 건 화근의 씨앗이라고.”
“그것 참 얼토당토 않은 말이군요.”
“반 정도는 동의하네. 자네가 계속 나를 피해다녔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을 테니.”
조금도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 루카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3층의 계단과 왼쪽의 복도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루카스는 신경질적으로 옷깃을 소매로 걷어 털어냈다. 마사는 저 멀리 달아났을 루시엔을 떠올린다. 진작에 줄행랑을 쳤으니 지금쯤은 볼링장까지 올라갔으려나. 만약 3층에 객실이 있다면 단박에 들어가 문을 걸어잠갔으려나.
“지금도 내 질문에 답을 내리지 못한 건 마찬가지일 테고.”
“저는 더이상 그때의 헬런드가 아닙니다.”
“조금도 질책할 생각은 없소.”
“그러면, 왜…….”
“글쎄.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인가.”
나도 모르겠군. 마사는 속으로만 그 말을 삼켰다. 그리고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일그러지는 루카스의 낯빛을 바라보다가, 지팡이로 바닥을 두 번 두드리며 화제를 돌렸다.
“자네가 찾는 사람은 어떻게 생겼나.”
“저보다 좀 작았습니다. 머리는 하얗게 샜고…….”
“하얗게 샌 것까지는 아니던데.”
“……대위님.”
숨을 죽이느라 전보다 붉으락푸르락한 기색이 가라앉자, 마사는 얄궂고 무심하게 고개를 까딱이며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래. 오른쪽으로 갔소. 아마 계단으로 올라갔을 거요.”
“감사합니다. 전 이만 그 자한테 볼 일이 있어서.”
루카스는 마사에게 인사한 뒤 재빨리 뛰어갔다. 급하게 쫓아가느라 마사와 어깨를 부딪혔지만, 그는 이런 일에 아랑곳할 사람은 아니었다. 한 층 아래의 괘종시계에 달린 분침은 한 칸 밀려나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아량을 베풀었다고, 마사는 태평하게 생각했다.
공교롭게도 재회는 산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이루어졌다. 마사가 387호실의 문고리를 잡을 때, 386호실에서 동그란 머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마사는 뒤늦게 여태껏 그와 나란히 방이 붙은 채 지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제기했다. 다만 입밖으로 내어놓은 것은 그 반대다.
“남의 방에서 뭘 하는 거요?”
“명백히 정식으로 안내 받은 제 객실입니다, 부인.”
“그런데 하는 모양새가 꼭 생선을 훔쳐 달아나는 고양이 같길래.”
“글쎄, 비슷한 건 해본 적 있습니다. 317호의 열쇠라든가.”
“자네, 정말 도둑이었나.”
“정확히 말하면 그 용감한 행위는 브랜디글라스가 된 부인을 구하기 위한 발판에 불과했었죠.”
“또 그 헛소리군.”
“꽤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전혀.”
마사의 뒤편으로 인영이 지나가는 순간 루시엔의 손끝이 굳었다가, 직원의 옷차림을 확인하곤 안도하며 일부러 침울한 얼굴을 했다.
“돌려받는다면 축하의 정도가 아닐 겁니다.”
“그러게, 두 번이나 말했건만.”
마사는 그를 미리 위로해주는 대신 아무렇지도 않게 으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