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척스러운 사람은 대개 잃을 것을 쥐고 있다. 마사에게는 계급장이 그러했다. 마사는 수많은 남성이 몸 담은 불길에 걸어들어가길 자처했지만, 각오와 현실은 다른 법이다. 그는 작은 이유로 징계를 받아가며 이십 년을 들여 대위의 자리에 올랐다. 나이를 가리지 않고 윗사람은 존경해야 하는 법이라 해도 마사와 어깨를 겨누다 치고 올라간 이들은 그럴 만한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마사는 분노를 삭인 만큼 좌초되었다. 그는 보통의 다른 훈련생들에게도 공연히 무시당하고 있었다. 엄하게 다스려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마사는 교육 장교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던 중이었다. 그렇게 소령에 오래 진급하지 못한 장교에게는 귀족의 사주를 받은 소대에 의해 어린 훈련생 하나가 주어졌다. 하늘에서 떨어진 헬런드 가의 차남은 마지막 기회였다. 그리고 또다른 벌이었다. 높은 위상을 가진 백작가의 눈밖에 나는 순간 모든 책임은 호프먼 대위에게 되돌아올 게 당연했다.
외견상으로는 다른 장교와 관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어린 소년에게 맞춘 훈련이기에 크게 잘못될 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대신 마사는 소대에 있는 누가 되었든 그들이 새 훈련생에게 ‘이런 장교’에게 교육을 받게 되어 미안하다는 말을 하리라 의심치 않았다. 암묵적인 위계는 폭력이었고, 마사는 아무리 엄격할지언정 자신의 아픔에 관대해지는 법을 배웠다.
조금도 실수해서는 안 된다. 새 사람은 제게 또다른 상처를 남길 것이다. 마사는 그 다짐 뒤에 루카스 윌리엄 헬런드를 만났다.
훈련 첫날 아침, 마사는 루카스를 따로 불렀다. 일찍 몸을 데우던 소년은 그 명령을 달갑게 받았다. 소년은 때 묻지 않아 달아오른 뺨을 문지르는 대신 꼿꼿이 섰다. 군대는 하나의 사교계나 다름없어 명망 있는 귀족들이 장교의 자리에 오르는 곳이었기에, 마사는 그 어린 아이에게 어른들을 덧씌워 물었다.
“다시 한 번 묻지. 자네는 무엇을 위해 대영제국에 충성하려 하는가.”
“영국과, 군과, 인간의 승리를 위해 몸을 바치고 싶습니다.”
“그 각오 하나는 높이 살 만 하나, 반대로 누구나 입에 담는 말이기도 하군.”
냉랭한 시선에도 열다섯 살의 소년은 마치 그 시험을 기다렸다는 듯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넓다란 숲을 닮은 눈이 또렷하게 빛나자, 마사는 턱을 내리며 응시했다. 소년의 입이 벌어졌다.
“제대로 군에 대해 배우겠습니다. 제가 누구보다도 빠르게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귀족들이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힘쓸 겁니다.”
“외람된 말이겠지만, 헬런드 훈련생 또한 귀족이오.”
“대위님. 이미 한 번 말씀 드렸던 이야기지만, 혹시 실례가 되는 첨언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이번만 허락하지.”
“지금의 군은 귀족들이 쉽게 장교로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길로 올라가는 대신, 앞으로는 평민과 귀족을 가리지 않고 직접 질서를 정립하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발라클라바 전투와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게끔 말입니다.”
당돌하게 흘러나오는 말은 이미 다른 군사학 스승으로부터 다져진 몸만큼이나 단단했다. 마사는 다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어제는 군화에 가래침을 뱉는 소령을 흘겨보기만 했던 볼품없는 스스로를 돌아본다. 만약 헬런드 가의 차남의 말대로 잉글랜드를 바꿀 군인이 정점에 있었더라면 호프먼 대위는 이 연대에 부끄러운 사람이 아니었을까.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다시 시선이 들린다.
“이제 되었습니까?”
“……충분하네.”
그 대답 끝에 루카스의 미소가 어린 한편, 마사는 속으로 훈련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필사적으로 임해야 할 터였다. 그가 바라는 대로 해주면, 첫 만남에 말한 대로 지켜본다면 언젠간 그와 자신이 같은 자리에 오를 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기대가 어릴 일이었다.
십사 년 전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떠난 제자는 가슴 속에 탄환처럼 박혔다. 물론 루카스의 무릎 뒤에 꽂힌 것이 훨씬 고통스러웠겠지만 마사는 처음이자 마지막 제자와 함께 미래에 대한 기대를 잃었다. 진취적이었던 훈련생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지 않는 귀족은, 군인은,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이 틀렸다.
마사는 그들을 깊이 증오했지만, 헬런드 가의 의견을 수긍하는 다른 장교들을 꺾을 힘이나 내세울 출신조차 없는 자신이 가장 혐오스러웠다. 총기 어린 눈동자는 활활 타 사라지고 주눅든 어깨와 푹 숙인 정수리만 남은 루카스를 생각하면 회의감이 들었다.
웬 편지인가?
편지가 아닐세.
하지만 분명 무언가 적고 있었던 것 같은데. 받는 사람이, 루카스 윌리엄 헬런드? 아, 그…….
신경쓰지 마시오.
그렇게 염치가 없어서라도 마사의 손에 구겨진 서신이 수 통. 내용은 마사 홀로 기억하고 있다. 헬런드 가를 아는 만큼 루카스를 만나려 한다면 찾아가기 어렵지 않았겠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진작에 마음이 있었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루카스의 자리를 남겨두어야 했다. 마사는 루카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없음이 자명했다. 한때 그와 동기였던 군인들의 입에 험담이 오르내릴 경우 같은 자리에 총알을 박아주겠다며 욕을 붙였을 뿐이다.
가끔 마사의 팔이 떨어져나갈 것 같고 옆구리가 휑하고 다리가 아려오면 이 육신이 깎이는 고통을 어린 아이가 공유했던가 되새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찢어지는 아픔에 비명을 질렀으려나.
“아아아악─!”
마치 저렇게. 마사는 누군가의 비명 사이에서 정확히 그와 닮은 남자를 단숨에 찾아내고 방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췄다. 훌쩍 자란 키 탓에 캄캄한 악마의 화신 같은 그림자만 보았는데, 이제는 낙엽을 닮은 머리칼에 눈길이 갔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모래라고는 조금도 없는 따스한 바람이었다. 그런데도 목이 칼칼해져, 마사는 제자리에 붙박혀 있었다.
마주치지 않기 위해 접어 버린 안부를 생각한다. 필연이었다. 마사는 누군가 자신의 앞에 루카스를 데려다놓은 것이 필히 가슴에 얹힌 죄책감을 가중시키기 위함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사는 아주 만약 작은 기적이 주어진다면 그의 미소를 보는 데 쓰고 싶었다. 다가가는 순간 산산조각났지만.
머리를 짚고 설레설레 흔드는 그는 괴로워보였다. 무어라 말을 걸기도 전에 그가 고개를 숙여 낮은 키의 눈과 마주치자마자 경기를 일으켰다.
“허억─!”
비명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건만 지금은 무언가가 치밀었다. 루카스가 물러나자 마사는 지팡이를 감싸쥐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떨구더니 신음을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귀가 점점 멀어가는 마사는 루카스의 입모양을 보기 위해 스스로를 우물 안에 고이게 억누르고 다가섰다.
“아니야, 아닙니다. 호프, 먼, 대위님. 전, 더 할 수 있다고, 하셨, 지 않습니까.”
“루카스.”
“분명, 더 지켜보자고, 하셨지 않습니까.”
“내가…….”
“그런데, 왜…….”
“내가 자네를 너무 오래 홀로 두었군.”
“…….”
“같이 돌아감세.”
자세가 무너지는 루카스의 큼직하고 단단한 손을 감싸쥐었다. 그러면 알 수 있었다. 그는 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버려둔 것은 나자신 뿐이다. 마사는 귓가에서 죄책감을 집어삼킬듯 원망하며 소리를 지르는 루카스의 환청을 들었으나, 그는 그럴 만한 상황조차 아니란 걸 확인하곤 근처의 직원을 불러세웠다. 멈춘 사람은 주저앉은 사람이 쩌렁쩌렁하게 윽박지르며 직원의 멱살을 쥐어 비틀었던 그 망나니 루카스 헬런드라는 사실을 알고 멈칫했다. 마사는 한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컨시어지를 올려다보았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보면 모르겠소?”
마사는 단호한 태도로 직원에게 지팡이를 들려주고 루카스를 부축했다. 자칫 환각에 빠져 주먹을 휘두를 지도 몰랐지만, 뼈 하나쯤은 잃어주면 그만이었다. 가르시아는 마사와 자리를 바꿔주는 대신 그 옆에서 조용히 걸었다. 루카스는 걷는 내내 마사의 눈을 두려워하면서도 결코 분노하지 않았다. 389호실에 도착하고 나서 악몽에 정신을 잃은 루카스를 눕힌 다음에야 가르시아는 무안하고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마사는 고개를 젓는 대신 대답했다.
“한 가지 조언을 하지. 이 자가 자네에게 말썽을 피울 것 같으면 내 이름을 대게.”
“실례지만, 혹시 어떤 관계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객실을 배정해드릴 때 고려하지 못했군요. 운이 좋게도 근처이긴 합니다만…….”
“글쎄. 루카스에게 물어보시오.”
내 유일한 제자일세. 마사는 차마 덧붙이지 못했다.
“지금은 전역한지 좀 되었네.”
“은퇴하시기엔 아직 정정하신 것 같습니다만.”
“군인은 탄환이 어딘가에 한 번씩은 박히더군.”
“호, 프먼, 대위님…… 도 말입니까? 어디가…….”
계단에서 내려와 자신을 피하려 드는 루카스를 불러세운 건 가벼운 충동이었다. 마음을 주고 받은 것과 별개로 마주치기 싫었던 것은 피차일반일 지도 모른다. 마사는 그가 제대로 깨어 움직이고 말하는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불행하게도 영국이 평가절하한 유망한 대위─정확히 말하면 한참 아니었지만 마사는 그가 자신을 넘어서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루카스를.
그는 부상 소식을 알리자마자 하릴없이 무릎을 꿇는다. 장성한 남자는 풀어진 옷매무새를 가다듬기에 늦은 어린 소년이었다. 집무실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모습과 닮아서 마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앞에 마주 앉아 온정을 나누지 않았다. 마사는 까마득한 옛날 주눅든 아이의 손을 잡아주지 못한 것을 후회했지만, 지금 움찔거리는 손 위에 제것을 겹친대봤자 위선이었다. 어제는 어쩔 수 없었다. 스승이란 으레 모범이 되어야 했고, 무정한 대신 제자의 속내를 다른 식으로 헤아려야 하는 법이다. 피할 이유를 잘라내야 한다.
“그러니까, 자네가 스스로를 부끄러워 하는 건 나를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소.”
“제가 부끄러워하는 건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마주친 눈이 열기로 일그러지고, 입매가 꺾이고, 빗어넘긴 머리가 흐트러졌다. 바싹 타들어가는 입술만큼이나 그는 이 상황이 막막해보였다. 마사는 닳았지만 튼튼하게 묶은 제 군화 끈을 내려다보며 그의 절망에 안도했다. 고민의 여지는 루카스의 미처 다듬어지지 못한 진흙 속의 원석이었다. 아예 남김없이 으깨졌다면 지금쯤 제 시야에서 사라졌을 게 분명했다. 그래, 그는 마사가 아는 루카스였다. 늦었지만 늦지 않았다.
“여기서 만나 뵐 줄 몰라서 당황했을 뿐입니다.”
“그래. 그러면 다음에 다시 물을 테니 고민해보게.”
마사는 무르게 굴던 아버지를 닮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훈련생들에게 아량을 베푼 결과 자멸했다. 군인에게는 올바른 질서가 필요하다는 데에 이견은 없었다. 마사는 무슨 일이 있든 반성을 얻어내 기합을 주는 강박적인 대위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루카스를 순순히 보내주었다. 조금도 이해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소년일 적 뜻을 펼친 대로 마사에게 누구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다만 십사 년의 공백은 길었다. 마사는 루카스가 벽에 주먹을 내리치고 패악을 부리는 만큼 자신의 질문을 오래 고민하길 바랐다. 흙바닥으로 된 잠자리보다는 열 겹의 이불 아래 완두콩이 불편한 법이다.
베네치아가 오지 않는 호텔은 좁았고, 루카스는 그의 객실 번호를 아는 마사를 문전박대할 사람이 아니었으며, 오래 무릎을 굽힌 채 앉아있으면 일어나기 힘겹다. 그 고려에는 어떠한 동질감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짚은 지팡이는 까맣게 잊었다. 나도 참 늙었군. 이게 세월인가. 하지만 다음에는, 언젠간. 마사는 한 손으로 뒷짐을 지고 일부러 멀리 걷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