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목숨따위
2024. 5. 20.

 

빌어먹을 목숨따위

 

 어느 날 디디에는 제노바에 다녀왔다. 클로에의 전화를 받고 “그래. 갈게.” 라고 순순히 대답했고, 짐은 캐리어 하나에 가볍게 꾸렸다. 놀랍게도 그는 9개월 전 새로운 가족으로부터 도망친 적 있는데도 말이다. 그는 입술을 여는 사람이 자신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독을 대가로 디디에의 삶을 갈취하였기에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게다가 한 번 빼앗긴 적도 있으니 두 번이라고 안 될까.

  “손님?” 디디에는 수하물 수취대 앞에서 종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남색 캐리어가 컨베이어 벨트를 세 번째 돌고 있었다. 어느덧 입국장으로 떠나는 인파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는데, 디디에는 어머니께서 손수 달아주신 태그를 한발 늦게 알아보았다. “아, 네. 죄송합니다.” 부리나케 손잡이를 들고 바닥에 내리자 탕, 탕 하는 마찰음이 바닥을 때렸다. 그 정도로 급하실 건 없는데……. 디디에는 고개를 흔드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수취대에서 빠져나왔다.

  캐리어 바퀴가 매끄러운 바닥 위에서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났다. 서서 잔 것도 아닌데 무안한 기분이 들었다. 귀국 비행기에서는 기나긴 체공 시간동안 영화를 보다가 기내식을 먹고, 그러다 피곤하면 잠도 잤다. 깨고 나서는 기억하지 못할 게 분명한 꿈을 여러 번 꿨던 것 같다. 엄마께서 깍둑썰기한 당근을 가득 넣은 카레를 먹어야 키가 큰다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88 올림픽 때 올림픽 선수촌 식당에 당근이 냄비의 반을 차지하는 카레가 나왔던 적도 있다……. 디디에는 그렇게나 중요한 사실을 알려줘서 고맙다고 하며 자연스럽게 수저를 떴다. 뭐 죄다 말도 안 되는 개꿈이었다. 프랑스 여행은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평범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실 걱정한 적도 없었다. 그는 고향집이 있는 제노바에서 일주일을 지냈는데, 그중 사흘은 해변에서 클로에의 손을 잡고 보냈다. 스크린 안의 이상적인 남매를 지켜보는 것처럼 천천히, 길게 카메라가 회상을 따라갔다. 클로에는 못 보던 새에 한 뼘 자라 있었다. 디디에는 바닷바람에 넘실거리던 클로에의 긴 머리카락이 엉킬까 봐 묶어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오는 잔머리를 그러모으느라 애를 먹었다. 모든 것이 물에 잠긴 것마냥 무뎠고 조금은 피곤했다. 왜 괜찮았더라. 왜 나쁘지 않았더라.  무저갱을 지나 근원을 더듬어나가던 현실감은 반투명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대번에 미루어졌다.

  그는 디디에를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디디에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시현은 디디에를 향해 꼿꼿하게 몸을 세우고 있었고, 사금처럼 반짝이는 먼지가 시현의 주변을 날아다녔다. 디디에는 모르는 사람이 애인 행세를 한다는 것처럼 벙쪘다.

  “너…….”

  “네.”

  “왜 여기에 있어?”

  시현은 염치도 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와~ 너무하네요? 데리러 와 달라고 한 건 당신이잖아.” 

  “내가.”

  “네, 코드네임 시간의 침묵. 팬 네임 시침. 논문을 내고 잠수탄 휴학생 디디…….” 디디에가 시현의 입을 턱 막았다. 시현의 장난으로는 왜 디디에가 그를 불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디디에는 시현의 아주 중요한 비밀을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이 시현을 편하게 부를 수 있는 구실이 되어주지는 않았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시현이 가볍게 눈을 흘기며 쳐내기 전, 디디에가 천천히 손을 뗐다. 

  “그만해도 돼.”

  “발인 마치자마자 몇 시간 내내 운전한 내 심정을 알아주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데요. 두말하게 하지 마요. 갈 길이 머니까.”

  시현은 디디에가 결국 자신의 말을 따라 고개를 까딱거릴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내용이 퉁명스러운 것치고 짜증난 기색을 띠지는 않았다. 시현이 검지로 차 키가 달린 열쇠고리를 돌리면서 앞장섰다. 그는 먼 길을 운전한 사람치고는 들뜬 것처럼 보였다. 그 이유도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디디에는 얼굴 반쪽을 한 번 쓸어내린 다음에야 대답을 씹어뱉었다. 원인은 그 다음에 찾아도 좋았다. “잠이 덜 깼나 봐.” 사과 대신 단어 하나하나에 악센트를 주고선, 시현의 뒤를 밟았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못해서.”

  시현은 레이서 기질이 있었다. 인천IC에 들어가자마자 속도를 높이더니, 심판이 있는 경주를 시작한 것처럼 다른 차를 앞지르는 데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초입에는 머리 위로 비행기가 지나다니느라 허허벌판이었다. 마시멜로 같은 곤포 사일리지가 굴러다니는 논을 지나, 방음벽이 빠르게 차의 뒤편으로 밀려났다. 디디에는 저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꽉 쥐었다.

  “뭐가 그렇게 급해.”

  “내가 누구한테 쫓겨본 적 있어요?”

  “알아. 아는데, 그럼 이렇게 밟을 거 없잖아?”

  시현이 모른 척 어깨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오른발 앞꿈치를 부드럽게 눌렀다. 자동차의 계기판이 어느새 130km/h를 넘어가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추월당한 화물차가 빠아앙 경적을 울리자 디디에는 조금 화가 났다. 시현이 아랑곳하지 않고 시원하게 웃었다.

  “계산이 정확하다면, 차가 시속 150 킬로미터에 도달하면 정말 끝내주는 장면을 보게 될 거예요.”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당신 《백 투 더 퓨처》 안 봤네.”

  “그 영화가 무슨 상관인데?”

  “과거로 갈 수 있다고요. 그거 자동차 타고 시간여행하는 줄거리예요.”

  공항에서 바깥을 내다볼 때에는 노을이 서서히 저물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덧 주위는 캄캄했다. 가로등 불빛이 꼬리를 그리며 혜성처럼 뒤로, 뒤로 늘어졌다. 디디에는 그렇게 시간의 흐름을 밀어내곤 했다. 어둠 속에서 시현의 표정이 보일 듯 말 듯했다. 디디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말도 안 돼.”

  “당신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 게 있겠어요? 결국 능력도 다 원리가 있는 걸요. 주어진 자원을 어디로 이동시키는지, 얼마나 확대하고 축소하는지에 따라서 나타나는 결과가 다를 뿐이고요. 나는 재생을 앞당기잖아요. 반대로 연마하기만 하면 뒤로 밀어낼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건 재생일 뿐이잖아. 사람을 낫게 하는 거…….”

  “이 차가 범위를 바꾸어 주죠.”

  “차라리 백색 마정석이라도 심었다고 하지그래.”

  “어느 정도는 맞아요. 당신이 본 것만큼은 안 되어도 정부가 공들인 수작이거든요. 내가 훔쳤지만.”

  “하……. 환장하겠네. 그만둬, 백시현.”

  “싫어요. 왜 그래야 해요? 어차피 진짜로 돌아가고 싶었던 건 당신이잖아요?”

  디디에도 그게 의문이었다. 시현은 미래를 새로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이미 경험해본 때로 갈 필요 없이, 종이를 새것으로 갈아치우면 그만이라는 심보였다. 반면 디디에는 정말로 옛날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훈은 지훈으로, 디디에는 디디에로, 텔리아는 텔리아로 살아가던 아홉 달 전 과거로. 시간을 돌려봤자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만일의 확률에 걸어보고 싶었다. 디디에는 숨 반절에 사람의 무게를 가늠하며 수그리고 지냈거늘, 지금은 시현이 디디에의 곁에 맞추어 몸을 내던지고 있었다.

  “그러는 너는. 너도 돌아가고 싶었던 거 맞아?”

  디디에는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디디에와 이해를 주제로 내기를 건 시현과 전혀 달랐는데, 어디선가 비슷한 모습을 본 적 있었다. 시현이 정면만 주시하자 디디에는 등받이에서 일어나 목소리를 굳혔다. 그는 운전에 썩 집중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대답해.” “하, 하, 아하하하하!” 시현이 단숨에 카랑카랑하게 웃어제꼈다. 그는 백시현이 아니었다. 디디에는 재빨리 핸들로 손을 뻗었다. “거짓말이었지. 순전 자살 행위야!” 시현은 자신의 것을 지키듯 우악스럽게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국도로 빠져나오자마자 핸들을 홱 꺾었다. 계기판의 바늘이 오른쪽을 찍고 있었다. 

  쾅!

  시속 150 킬로미터. 차가 그대로 표지판 철근 기둥을 들이받았다. 지옥 같은 소음과 굉음이, 병실의 적막 사이에서 들리는 기계음이 관자놀이를 꿰뚫었다. 차 범퍼가 찌그러지면서 주변이 느리게 흘러갔다. 표지판 뒤편의 낯선 나무들이 디디에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온몸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귓바퀴를 타고 이명이 고막을 두들기고 있는데, 그 사이에서 운전자의 호흡은 느껴지지 않았다. 퍼뜩 에어백에서 고개를 들자 이마가 뜨거워졌다. 유리에 긁혀 피가 흘렀다. 시현은 핸들에 머리를 박고 늘어져 있었다. 숨이 멎을 것처럼 디디에의 심장이 뛰었다. 디디에가 천천히 어깨를 잡아 흔들자 시현의 한 팔이 툭 떨어졌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디디에는 그의 죽음을 수차례 목격했다.

  장마가 길게 이어질 즈음의 꿈이었다. 지훈은 디디에가 되고 나서부터 자신이 어떤 꿈을 꾸는지도 몰랐다. 눈꺼풀을 닫으면 피로가 몰려왔고, 허기가 지면 아침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실체를 갖추더니 목을 죄어오기 시작했다. 첫 꿈에서 디디에는 길드원들과 함께 도심에 나타난 괴물을 처치하고 있었다. 눈이 번들거리던 괴이가 먼 곳에서부터 기다란 팔을 휘둘렀고, 디디에가 시간을 느리게 감았다. 그 사이 검을 든 헌터가 어깨를 베었다. 그러나 잘려나간 괴물의 팔은 계속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일어나.”

  디디에가 시현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시현이 헝겊 인형처럼 힘없이 뒤로 젖혀졌다. 그리고 눈을 떴다. “안 죽은 걸 용케 알았네요.” 그제서야 디디에는 제대로 숨을 들이마실 수 있었다.

  “몰랐어. 너라면 내 말을 들어줄지도 모르겠다고 기대한 거야.”

  “그냥 내버려 두지. 진짜 타임머신이었는데.”

  시현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한 손을 머리 반대편에 대고 목을 맞췄다. 디디에는 헛웃음을 지었다. “생명을 연료로 쓰는 타임머신?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제가 붙인 숨인데 쓸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그것도 반절이지.” 피가 천천히 디디에의 뺨을 타고 떨어졌다. 디디에의 눈앞이 핑핑 도는데도 닦을 생각은 없었다. 무엇부터 잘못되었던 건지 억울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디디에는 오래전부터 불운의 이유를 찾으려고 애썼다. 그 불씨는 누구 하나를 가리켜 탓할 수 없이 번져 있었는데도. 시현은 뛸 줄 모르는 사람처럼 너그러웠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무감정하게 보였다. 디디에가 유리 조각을 떨쳐내고 시현의 목을 움켜쥐었다. 

  “컥…….” 시현은 보통 사람처럼 고통을 느꼈다. 뭍 위로 나온 물고기처럼 퍼덕거렸다. 그것도 잠시, 그는 이런 상황을 몇 번 겪어본 것처럼 코로 숨을 길게 들이마셔서 가쁜 호흡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조용히 디디에를 바라보았다. 디디에의 입술이 여러 번 헛손질을 하듯 달싹였다.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래?”

  사고의 열기가 남아있는 즈음, 뜨뜻한 목에서 맥박이 일정하게 뛰었다. 디디에는 수많은 사람을 살게 한 헌터의 명줄을 쥐고 있다. 동시에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한 살인자에게 목줄을 채운 꼴이었다.

  “뭐가요. 괴물의 외팔에 내 목을 갖다 바친 거? 불이 난 건물 옥상에서 당신을 탓하듯 내려다본 거? 당신 동생과 없던 추억을 만들어준 거? 그것도 아니면, 당신에게 죽어도 마땅한 짓만 골라서 하는 거?”

  디디에는 목을 조르는 손끝에 피가 저릿저릿 통하지 않는 것만 같아 소리쳤다. “전부 다. 네가 아는 거 전부 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거세게 부딪히고 이마와 뺨을 긁힌 충격이 아파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아직도 그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어서였다. 디디에는 자신이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싸워도 좋으니 자신을 솔직하게 터놓을 수 있는 곳에서 적당한 책임을 이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된다.

  “그냥요.”

   누가 아프거나 죽든 어련히 넘길 수 있을 법한 사람에게 명령이 통할 리 없다. 협박도 들어먹질 않는다……. 축을 제자리에 두어 시간이 흘러가지 않는 모래시계를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디디에는 유리벽을 깨부술 만큼의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수그리고 애원하는 편이 쉬웠다.

   “부탁할게. 제발 내 꿈에 찾아오지 마. 진심으로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머리 끝까지 치솟은 화가 차마 사그라들지 못한 채 이마에 금을 내고 있다.

   “넌 다 가졌잖아. 마음대로 절망할 권리까지 앗아가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나는 정말이지 가진 게 없는데. 아무것도. 아무도…….”

“아직도 모르나보네요. 당신은 나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에요. 이런 꿈을 계속 꿀 정도로 미련을 안고 사는 거지.”

   “세상도, 나도 버리지 못하는 욕심쟁이는 당신이에요…….”

 


중간 세이브~ 마지막 문단 못 씀...

지인 리퀘스트

12월에 썼나??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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