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패러독스
역시 시간 낭비였나
도쿄에서의 생활도 거의 끝나간다. 모교와 자매결연을 한 일본의 고등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온 지 넉 달이 다 되어간다. 현준은 어영부영 타지에서 시간을 보낸 걸 후회하지 않았다. 돌이켜볼 시간에 카메라를 한 번 더 들여다본다. 교정을 오가는 학생들이 렌즈에 맺힌다. 카페나 판매 부스 슬로건이 덕지덕지 붙은 창문도. 셔터를 누르면 시끌벅적한 소음, 여름의 노을에 맞닿은 습도가 포착된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는 2학년이 찍혔다. ‘이 정도면 부장도 통과해주겠지.’ 현준은 짧게 깎은 뒷머리를 긁었다.
현준은 부모님과 친했던 교감 선생님의 추천서를 받아 교환학생에 지원했다. 아버지는 교수, 선생님은 교육자라고 하하 호호 웃으며 현준의 앞날을 다과 삼아 차를 마셨다. 그는 입시에도 도움이 안 될 교외 활동을 인생의 경험이라고 내세우는 두 사람의 교육관이 팔자 좋은 사람들이나 꿈꾸는 방임주의에 꼴불견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뭐든 집보다는 나을 것만 같았다. 해외란 평범하게 일탈을 꿈꾸는 청소년에게는 아주 좋은 도피처였다. 작년 한 학년 위였던 일본 학생들은 수업에 자습에 지친 자신보다 훨씬 즐거워 보였다. 물론 도쿄에 오고 일주일 만에 편견으로 판가름 났다.
매년 학생들은 3월 중순에 와서 7월 말에 돌아간다. 현준은 동급생들끼리 무리를 웬만큼 형성했을 즈음에 왔다. 첫날 아침, 2학년 A반 담임 선생님이 손뼉을 쳐 이목을 끌어도 학생들은 별 대꾸 없었다. 현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칠판에 이름 석 자를 한글로 썼다. ‘설현준’. 그 아래에 한자를 쓰다가 분필을 부러뜨렸다. 아이들은 이름을 쓰는 동안 조금 집중하느라 잠잠해졌다가 금방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날카로운 시선에 금세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잘 부탁합니다.” 아무리 유창해도 건성이었다. 그러고는 교실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현준은 일본으로 오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못을 박듯 한 가지 결심했다. ‘난 절대 피곤하게 살지 않을 거야.’ 그야 자신을 귀찮게 하는 어른들을 떼어놓기 위해 도망쳤으므로 다른 여지는 없었다. 그렇게 하루는 산속에 은둔하는 괴팍한 도인처럼 그림자 드리운 얼굴로 잠이나 잤다. 이튿날은 음료 자판기를 찾아 운동장 근처만 어슬렁거렸다. 주스 팩을 마시며 몰래 게임기를 두들겼다. 사흗날 선생님이 현준을 불렀다. 요점은 새로운 교환학생이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다, 친구들이 다들 걱정하고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동아리에 가입해봐라. 현준은 들으며 어처구니를 잃었다.
“그 애들을 친구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요.”
하지만 조언은 따랐다. 성실히 임할 이유가 없었지만, 굳이 우겨가며 못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현준은 타지에서의 생활을 편하게 누리려고 했을 뿐 걱정을 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추천한 교감 선생님이나 부모의 귀에 학교에서 적응을 잘하지 못한다더라 하는 이야기는 들어가지 않길 바랐다. 그는 신문부에 들어갔다. 교내신문에 들어갈 사진을 찍고 기삿거리를 메모하는 일을 받았다. 카메라를 들고 어디든 누비면 주변 사람은 적어도 현준이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는구나, 그렇다면 학교 수업에는 조금 관심이 없을 뿐이구나 하고 말았다.
현준은 학교 문화제가 열릴 때도 셔터를 눌렀다. 두 학교에서는 기말고사를 마치고 겸사겸사 축제를 여는 전통을 유지했다. 현준이 있던 2-A 학생들은 한 달 전부터 연극 준비로 분주했다. 현준은 배우라면 한사코 사양하고 축젯날에 귀찮지 않을 일을 달라고 해 무대를 만드는 데 협조했다. 줄리엣의 발코니가 될 판자에 물감을 바르며 현준은 팔자 좋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있을 애들은 다 시험공부나 하고 있겠지……. 그게 싫어서 왔어도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청춘이니 축제니 하는 단어에 무감했다. 그저 일찍 하교하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기삿거리를 찾고, 부스를 인터뷰하고, 몇몇 학생들에게 “이거 찍히면 신문에 얼굴 나와요?” 하는 질문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저도 몰라요.” 하고 답하다 보면 해가 기울고 말았다. 시간은 무신경하게도 흐른다.
사흘 중 마지막 날, 언제든 현준은 돌아갈 수 있었다. 학생들이 뒤섞여 열기로 들뜬 축제에서, 그는 파도에 밀려가는 해파리처럼 미적거리고 있었다. 본디 무엇이든 마지막에 다다르면 포기하는 사람이었다. 인파를 향해 초점을 맞추다가도 셔터를 누르는 걸 멈추는 것처럼. 이미 해온 게 있다며 모르는 체하는 베짱이처럼. 그는 본관과 별관 사이 바깥에 남겨져 있다. 분장을 한 학생들이 무리 지어 지나가자 벽으로 비켜서서 왼손의 시계를 확인하면, ‘유령의 집’ 팻말 아래의 안내원이 장난스럽게 핀잔을 줬다.
“체험할 거면 줄 똑바로 서라.”
“아, 아야네 선배. ……이 부스 선배 반 거였어요?”
“그렇게 되었다!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 그걸 잊어버리다니. 포기 못한 내 잘못이지… 사진은 많이 찍었어?”
“괜히 왔군. 뭐, 그럭저럭요. 그래도 골라볼 만큼은 돼요.”
“너도 참 징글징글하다. 귀신의 집에도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냐! 그것도 혼자서.”
“혼자 아닙니다.”
“으응?”
“혼자서 들어갈 거 아니라고요.”
그래서 그게 누군데
생각해 봐요……. 같이 가기로 한 사람이 약속은 까맣게 잊고 연락도 안 받으면 어떨 것 같아요?
하는 수 없지, 포기하는 수밖에. 그렇게 중요한 거면 까먹지도 않고 잘 기억했겠지~ 정 안 되면 찾으러 가든, 계속 기다리든지.
그래서 뻐팅기는 겁니다.
설마 친구야?
뭐… 그런가? 그럴지도…….
네가?!
담임의 소개를 받아 찾아간 신문부. 신문부의 부장 아야네는 현준을 반겨주었다. 마침 사진을 찍는 부원이 전학을 가서 공석이었다느니, 신문부는 1학년에게 인기가 없었다느니 투덜거리며 카메라를 들려주었다. 현준은 소음을 대충 흘려보내고 낯선 얼굴로 장비를 매만졌다. 어머니께서 주신 카메라와 같은 기종이었다.
“그냥 제 카메라로 찍어도 돼요?”
“카메라가 있었어? 원래 취미였나?”
“네, 오기 전에 봉사하느라 조금은.”
“선생님이 사람 하나 제대로 소개해주셨구만? 마음대로 해! 가져와! 대신 절대 나가지 마. 제발. 너도 없으면 진짜 힘들어진다구~ 응? 약속이다?”
“아니, 체험이라고 들었는데요. 가입은 생각해 보고…….”
“5월 기사는 생각보다 별거 없어. 어차피 메인 카피는 다 뽑아놨고 학교 사이트에 올라갈 사진만 몇 장 더 찍으면 돼. 원래 우리 부서 일은 아니지만, 선생님들께서 자주 부탁하셔. 인쇄니, 뭐니 고문 선생님께 도움 받을 일이 많으니까 하는 수 없지. 게다가 이번에 학교 시설 사진을 싹 다 갈겠다나. 그건 좀 심했지! 듣고 있어?”
“뭐라고요?”
“하나도 안 들었네. 그러니까, 학교 시설은 남김없이 다 찍어오라고. 알았지?”
현준은 아야네에게 등 떠밀려 내쫓길 때 이 동아리는 글러 먹었다고 생각했다. 뜬금없이 들려준 카메라, 친한 사람 하나 없는 여행지에 뚝 떨어져 지도 없이 세상 끝 바다에 찾아오라는 숙제를 받은 것만 같았다. 현준은 염치없는 선배를 미워하는 것을 그만두고 길을 찾았다. 바다가 어딘지 모르면 파도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가면 된다……. 방과 후에는 쏜살같이 귀가했지만,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 틈틈이 부실이 있던 4층부터 천천히 건물을 돌아 복도의 끝을 찍고 다녔다. 이 숙제를 마치고 나면 카메라를 안겨주고 손절할 생각이었다.
하나 문제가 있다면, 이 고등학교가 지나치게 크다는 것이다. 현준은 지원금을 어지간히 많이 받을 정도로 위상 높고 명성 있는 학교라는 걸 자각 못했다. 그야 체육 시간을 제외하면 반에서 잠을 자거나 게임이나 하며 보냈으니까. 본관과 별관으로 나누어진 건물은 층마다 통로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래 다녀보지 않고서야 기억하기 어려울 만큼 모퉁이가 꺾여 있었다.
태양이 작열하는 점심시간, 현준은 바깥으로 나왔다. 운동장에서는 또래의 학생들이 축구공을 뻥뻥 차며 뛰고 있었다. 중학생 시절에는 축구를 오래도 했다. 똑같이 점심을 먹고 나면 종이 쳐도 골을 넣으려고 애쓰다 선생님께 혼이 났던가. 조금 구경하다가 별관 뒤편에 있다는 연못에 가볼 생각이었다. 무거운 카메라를 안고 스탠드에서 한숨을 돌리던 찰나, 공이 현준이 있는 쪽으로 날아왔다. 현준은 다급하게 웅크려 뒤통수에 공을 맞고 카메라를 지켰다. 맞은 부분이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단숨에 먹은 것보다 얼얼했다.
“……이거 깨질 뻔했잖아!”
“야, 저기로 차면 어떡하냐? 공 저기 있으니까 니가 가져오든가…….”
“아니, 말하면 되지. 저기요, 거기 축구공 좀 주실래요?”
“빨리 좀 주워 와! 점심시간도 얼마 안 남았다고.”
사과하기에는 민망했는지, 맞은 건 본체만체 고개를 까딱이는 아이들을 보고 말문이 턱 막힌다. 입술이 바싹 마르고 피가 끓었다. 그 순간 뒤에서 누가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저기요, 무작정 그러시면 안 되죠! 방금 사람이 공에 맞았잖아요!”
화들짝 놀라 돌아보면, 같은 반 학생인 줄 알았더니 그냥 목청이 좋았던 1학년이다. 현준은 순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사람이 염치가 있지! 빨리 사과해요, 사과! 이분 지금 아무 말도 못하신다고요!”
“야. 너 시끄러워……. 머리 아파.”
“네? 괜찮으세요?”
호들갑을 떨며 안색을 살피는 히카루의 눈빛에, 현준은 괜히 성질이 났다. 이 학교 사람들은 무엇 하나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는 성정을 타고났나 보다. 그만 가만히 내버려 두면 될 텐데! 하지만 질린 것 치고는 머리가 너무나도 아팠고 억울했다. 이마에 손을 대는 히카루를 떼어내고 비틀비틀 일어나면 이목이 쏠렸다. 현준이 공을 차주지 않자 주변으로 공을 주우러 오던 학생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현준은 신경 쓰지 않고 축구공을 뻥 차버렸다. 공은 시원하게 일직선으로 날아가더니 운동장에 가장 건성으로 말하던 남자애의 얼굴 가운데를 빡 때렸다. 현준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 이제 됐냐?!”
“와, 깜짝이야! 이 선배도 만만찮네! 어떡하지? 싸우면 안 되는데~ 싸우지 마세요! 선생님 불러올까요? 아니, 코피 나나 봐. 우리 도망쳐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걔는 네가 무슨 생각으로 기다렸는지 알기나 할까
히카루는 그에게 없는 것을 갖고 있었다. 특별하게 끈기나 용기라고 칭할 필요 없는, 사람에게 있어 당연한 도리. 실례를 저지르면 사과하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으면 도와야 하고, 주변 사람과 친구가 되지 않고서야 못 배기는 천성. 히카루는 그 길로 어련히 알아서 가겠다는 현준을 붙잡고 학교를 소개해주었다. 연못에는 잉어가 산다. 밥을 조금 주면 올라올 테니 그때 사진을 찍어라……. 오지랖 중 오지랖이었어도 현준은 히카루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시키는 대로 찍었다. 그리고 부장의 찬사를 받아냈다. 입부는 그저 예정된 수순이었다.
히카루에게 소식을 전해줬더니 제 일처럼 기뻐했다. 현준은 자신보다 그 소식을 반기는 모습을 보고 조금 멋쩍어졌다. 이런 것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닌가. 현준은 학교에서 타지로 왔을 뿐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근처의 학교에 잠시 머무르는 것만 같았다.
어김없이 친구 타령을 하는 히카루에게 우정을 느낀 것도 잠시, 히카루는 늘 현준을 기다리게 했다. 혹은 현준이 기다리던 찰나에 나타났다. 현준이 카메라의 셔터를 누를 때, 누르지 않고 초점을 맞춰야 할 때 히카루는 꼬박꼬박 말을 걸었다. 그게 여전히 얄밉긴 했다. 그러나 그만큼 거절할 수 없었다. 축구공을 맞은 그날로 다시 돌아갔을 때 히카루가 없다면 억울한 채로 끝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어떻게 늘 자신을 그렇게 잘 발견할 수 있냐고 물었다.
“그거야, 전 원래 운이 조금 좋거든요. 현준 씨는 아니에요?”
“절대 아니라는 건 알겠어.”
현준은 얼마나 더 기다릴 거냐며 줄을 정리하는 아야네에게 간단하게 설명했다. 언제 사진 찍는 걸 도와준 앤데 귀신의 집에 워낙 가고 싶어 하길래 같이 가자고 했다, 궁금하다는 것 치고 걔는 쫄보였으니까. 아야네는 웃었다. “늘 친구 안 사귄다며 관심 없는 척하더니! 겁쟁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 현준은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줄의 맨앞에 왔을 때, 한숨을 쉬고 맨뒤로 돌아갔다. 그는 약속에 늦었으면 늦었지 사람을 배신하는 성격은 아니었고, 어떻게든 올 거라는 확신이 현준에게 있었다는 걸 그때 알았다.
“현준… 씨!”
히카루는 늦게나마 왔다. 어지간히 뛰어왔는지 뺨에 긴 머리카락이 다 달라붙었고,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짚고 사과했다. 현준은 마침 두 번째로 앞줄에 도착한 참이었다. 히카루는 현준이 부채질하려고 들고 있는 부스 홍보지 끝이 구깃구깃하다는 건 눈치챘지만, 현준이 아야네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그는 모른다. 현준은 히카루에게 살가운 눈길을 보내는 부장을 막고 턱짓했다.
“야, 됐어! 일어나. 들어가기나 해.”
“…진짜 저기 들어가요?”
“왜, 쫄았냐? 무섭다고 울기만 해 봐.”
현준은 괜히 앞장서서 걸으며 마지막으로 교복 앞주머니를 매만졌다. 주머니에는 두툼한 앨범이 들어있다. 여름의 작별인사로 적당한 선물이 될 테다. 뭐, 이 정도면 서운하다고 울지는 않겠지. 나는 곧 떠날 테니까.
이 다음은 단겡님의 글로 이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