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
“당신에게 따개비는 어떤 곳인가요?”
시작도 하지 않은 학도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야 없겠지요. 제가 펜스에서 지낼 동안 동료들은 누구도 그 집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묻지 않았어요. 그곳에서 떠나지 않기로 한 이상 소중히 여기기로 정한 게지요. 그렇다고 펜스를 소홀히 하느라 따개비에 입학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아브힐라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자신을 돌보고 일구는 터전의 중요성을 잘 아시겠지요? 마찬가지예요. 저는 그곳에 안주하고 있었고, 지나치게 만족하여 이대로 늙어갈 여지뿐이었지만 이번에 따개비의 하늘 고래를 목격하고 깨달았어요. 부족할 것 없는 삶은 새로운 배움으로 덮어줄 수 있다고요.
아, 이 팔이라면. 별것 아니에요. 가족을 배웅하러 노츠턴의 기차역에 갔다가 팔이 끼이는 사고를 겪었어요. 다른 마을은 잘 돌아다니지도 않는데, 마을에만 있던 사람이 낯선 곳을 가려니 생긴 문제였죠. 선생님께서 살펴보시기엔 마법이 필요한 것 같아 따개비에 온 것처럼 보이나요? 전 아주 진실만 골라 말하고 있답니다. ……그건 아니고 이런 변명은 안 통한다고요?
……맞아요, 팔은 이미 마법 없이도 충분해요. 왼팔을 쓰듯 움직일 수는 없어도 도구로써의 기능을 하고요. 하지만 열차에 끼인 것도, 마을 안에서 생길 법한 사고도 아닌 것처럼 보이죠. 호쾌하게 들어주시니 다시 질문의 본질로 돌아가야겠군요. 나한테 따개비는 원수를 가르쳐주는 곳이에요. 지피지기에 백전백승이라, 대륙 건너에서 구해 읽었던 책의 구절을 아시는지요? 물론 마법에 복수할 방법은 없어요. 하지만 전 ‘사람의 의지에 반응하는 힘’ 덕에 생업을 잃고, 이제는 동료마저 잃었어요. 의지라니, 전 살아생전 의지를 태우면 태웠지 잃어본 적은 없는데. 그리 비과학적인 일을 과학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응당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선생님처럼 자애로운 분이 세상에 많지 않고, 제가 마법을 배우고자 하는 의지는 분명하니, 모른 척 넘어가 주실 수 없겠습니까? 아, 그래요, 혼자가 된 저를 외롭지 않게 할 장소라는 말도 보탤까요?
“마법을 어떻게 생각해요?”
오던 길에 마법사도 아닌 누군가 핀잔을 주듯 말해주었는데, ‘사용자의 의지를 실현하는 강력한 힘’이라덥니다. 그러나 의지란 무엇이고 어떤 기준을 갖고 발현하는 걸까요? 기계는 장치를 조작하고, 톱니바퀴를 끼우고 기름칠을 하면 알맞게 돌아가요. 무언가 잘못되었으면 이유를 확실히 짚어낼 수 있어요. 마법 또한 그럴 만한 매개가 되던가요.
위대하고 부유한 마법사만이 아는 원리이고, 모두는 그 구조를 모르고도 칭송하지요. 마땅히 규명되지 않은 것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한데로 모으고 위안을 가져다주는 신앙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마법은 그렇지 않아요, 되려 누군가에게 상처를 남기고 죽음을 가져다주지요……. 선생님,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법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이곳은 제 질문에 해답을 가져다줄까요?
“꿈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요?”
아니요. 당장의 그 의문을 해소하는 것 말고는. ……음, 지나치고 흩어진 사람들은 꿈을 꾼다 해도 되찾을 수 없어요. 설령 마법으로 그럴 수 있다 한들 꿈이라 말하기에는 마땅히 지탄해야 할 일 아닙니까.
2막
“당신에게 따개비는 어떤 곳인가요?”
입학금 없이, 숙식을 제공한다는 전단을 내붙일 정도면 훌륭한 도피처가 되어줄 거라 믿었소. 그러나 그곳 선생과 학생들은 오랫동안 자신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더군. 나는 그런 불분명한 가능성을 원하는 게 아니었지. 후회했다. 차라리 제자리를 지켰다면 나았을까.
한동안은 마탑으로 가기 위한 발판 정도가 되었을 테요. 왜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말하느냐고? 그야 나한테 의미를 준 건 따개비 출신의 사람들이지 따개비 그 자체가 아니었어.
그런데 거기 선생은……. (무어라 덧붙이려다 침묵한다.)
“마법을 어떻게 생각해요?”
(새 문장으로 쓰자니 그냥 바이스와 나눈 역극을 그대로 옮기는 편이 이해하기 쉬워서 긁어봐요~)
(정립되지 않은 마법을 공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에) 조금 달라. 마법을 익히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소. 나는 마법이 늘 꿈을 이루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브힐라샤의 방식은 좋아하지 않아. 꼭 꿈에 기준을 매기는 것 같았거든. 나는 언제나 살고 싶었으니 꿈 없이 살아본 적이 없는데, 지금도 술식 없이는 마법을 그리지 못하지. 그렇게 나는 십오 년 남짓 꿈 없는 사람이라고 매기게 되더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따개비에 오기 전에는 꿈 꾸는 사람은 마법사라는 말을 해줄 선생이 없었기 때문일 거요. 마탑으로 간 건 꿈으로부터 도피한 것이니 반응해줄 것조차 잃은 게지. 조금은 원망스럽더라. 내가 따개비에 오기 전, 정말로 아무런 조건 없이 마법을 다룰 수 있었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 텐데… (수에냐의 탄압으로 조심스러웠을 거라고 짐작은 하지만, 마음에 깃든 병은 별개였다.) 기회를 얻고 나서야 건강한 꿈을 꿀 수 있는 사람도 어디엔가 있기 마련이오. 반드시 꿈을 우선해야 한다면 본의 아니게 소외되는 사람이 생겨나. 그래서 나한테 그 선생은 최선을 다했지 결코 정의롭다고 할 수는 없어. 아마 아브힐라샤는 무슨 말을 듣든 신경쓰지 않을 테지만 말요.
“꿈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요?”
나는 꿈을 꾸지 않아도 돼. 따개비에 오르기 전 아브힐라샤가 물었을 때, 나는 이미 꿈을 갖고 있었어. 항상 품고 있던 것을 버리는 순간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세상의 법칙을 원망할 기운마저 잃고 나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란 이럴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