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바른 곳으로
2022.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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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바른 곳으로

 

1

 

 “당신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렇게 보냈는지, 나는…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텼나요?”

 “외로움을 없애려고 노력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내가 할 일을 찾아 헤맸죠.”

 “그걸 찾았나요?”

 지나는 지팡이를 갈아주며 이반에게 물었다. 이반은 손에 들린 지팡이를 부드럽게 쥐고 지나에게 집중했다. 그러려고 노력했다. 머리가 웅웅 울렸다. “가지 마세요, 어머니.” “그런 게 아니야, 이반. 넌 여기서 잠시 우리를 기다리는 거야.” 이반은 방 밖에서 부모가 천운으로 은인이 나타났다거나, 아이를 두고 자신은 어느 곳으로 가겠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하던 것을 들었다고 덧붙이는 대신 조용히 말했다. “언제까지요?” 여자의 얼굴에 안도가 내려앉는다. 알게 모르게 이반의 심장도 주저앉았다. “네 아버지의 누명이 벗겨질 때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나도 그러고 싶거든.”

 지나가 태어나기도 전 응접실, 이반은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지도, 사용인이 내어준 과자를 집어 먹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적당히 맞장구치듯 미소 짓고 있었다. 어머니는 제 고모가 이곳을 추천해주었으며, 그 귀인은 집주인의 친척이라는 말을 하녀장과 나누며 고개를 숙였다. 하녀장은 선뜻 이반을 바라보더니 무던한 태도로 받았다. 차를 가져다준 문 뒤의 사용인들은 대체로 조용했지만 어른스러운 아이의 행동에는 감탄했다. 작고 마른 손으로 뭘 할 수 있느냐는 농담도 섞여 있었다. 이반이 흘깃 시선을 들자 그들은 흩어졌다. 이반은 두 손을 깍지 껴 내렸다. 부모의 일을 수습하기에는 걸리적거리는 자신을 맡아준 이곳에 깊이 감사를 표해야 했다. 평생 다해 갚아도 모자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는 그렇게 지금까지, 심지어는 그 아이의 딸에게도.

 이반은 찰나의 상념을 떨쳐냈다.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주인님을 모시고 나왔으면서도요…. 이상하죠?”

 전과 달리 속이 울렁거리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도 지나의 지팡이가 되고 싶었다.

 

 

2

 

 예금이 대거 사라졌다. 은행원은 범인을 은행장 마르티네스로 지목했다. 마르티네스는 인망이 두터운 만큼 정치에 무감했고, 추락하기 쉬웠다. 마르티네스 부부는 무고를 증명해줄 증인을 찾고 직접 도둑을 쫓기로 했다. 그들의 긴 여정에 이반을 데려갈 수는 없었다.

 이반은 콜 가문의 사용인 중 가장 어렸다. 게다가 먹고 잘 곳이 없어 값싸게 자신을 내다 판 하인들과는 다른 경로로 들어왔기에, 하인들은 이반에게 그리 어려운 일을 시키지 않았다. 이반은 집안 사정을 감추기 위해 그들 사이에 섞이려고 애썼고─청소와 빨래를 해본 적 없는 풋내기는 맞았다─, 주인님의 일정을 묻고, 콜 가문 사람들의 사정은 귀동냥으로 주워들었다. 세 달이 지나자 이반은 편의를 누리는 얼간이에서 그냥 싹싹한 어린아이가 되었다.

 그가 가장 먼저 찾아낸 제 일은 콜 아가씨를 보필하는 것이었다. 아가씨는 이반보다 한 뼘 작은 키로 온갖 창고를 들쑤시고 다녔다. 이반이 들어오고 이반의 부모가 떠날 즈음에는 웬만한 하녀들이 두 손 두 발을 들고 포기했었다. 이반은 한창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했고, 사용인들이 포기한 일은 아가씨가 유일했다. 그는 콜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시종은 못 되었지만, 운은 따랐다. 이반은 빨래를 다 널고 들어오는 길에 벽난로를 쇠꼬챙이로 들쑤시는 콜 아가씨를 마주쳤다. 저택에 들어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지만 이반은 양갈래로 땋아내린 머리칼만 보고도 눈치챘다.

 “나 아무것도 안 했어.”

 “네. 그렇지만 오래 쥐고 계시면 데일 거예요.” 이반은 조심스레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콜은 갈등하는 눈치였다가, 금세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 정도는 알아.” “그렇다면 들어 드릴게요. 원할 때 돌려 드리고요. 그리고 지금 본 건 비밀로 하겠습니다.” “영원히?” “원하신다면요.”

 콜은 의심하면서도 순순히 쇠막대를 건넸다. 막대는 중간까지 어느덧 달구어져 홧홧할 만도 했다. 그래도 이반은 덜 아팠다. 콜은 이제 가보라는 듯 건성으로 손을 휘적이다 문득 유심히 이반을 뜯어보았다. “가만, 너 같은 애가 있었나?”

 이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어온지 얼마 안 됐어요. 지금은 한창 일을 배우고 있고요. 이반 마르티네스라고 합니다.”

 “흐음.”

 콜의 눈이 가늘어졌을 때, 이반은 돌아가지 않고 물었다. “왜 쥐를 태우고 계셨어요?”

 “언제 봤지?” 콜은 머뭇거리다가 피곤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냥 오늘따라 그러고 싶었어.”

 “그런 기분이란 어떤 건데요?”

 콜의 따가운 시선은 금세 비꼬는 듯한 말투로 번졌다. 자세를 틀며 그는 말했다.

 “마음에 안 들었는데.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기분을 설명해봤자 이해할 수나 있을까?”

 이반은 눈을 깜빡였다. “이해해요. 어떤 식으로든 잘못된 마음은 없어요.”

 “…의자 갉아먹는 걸 봐줬는데, 내가 준 밥을 잘 안 먹었거든.”

 “네, 그래서 아가씨는 나아지셨나요. 괜찮으세요?”

 콜은 이반을 노려보았다. 이반은 콜을 타이르는 것처럼 말하지 않았다. 진솔하게 묻는 것처럼, 괜찮아졌다고 말한다면 동조해줄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이반은 누군가에게 등 떠밀리듯, 지금 물어보지 않는다면 콜 아가씨에게 영원히 다가설 수 없을 것 같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건…”

 이반은 콜이 어떤 대답을 들려주었는지 기억한다. 그는 다음부터 우연히 이반을 마주치면 무엇을 하는지 지나가듯 묻곤 했다. 어느새 이반은 콜의 공범이 되었다. 그날 하녀장이 쥐 사체를 태운 범인을 색출할 때 화상을 입은 손을 내밀며 자원했다. 사용인들의 숙소 문 위에 걸레를 빤 물양동이를 매단 다음 도망치도록 도왔고, 콜이 상냥해질 때에는 모른 척 피하다가 가끔 마을로 내려가 몰래 콜이 필요하다는 물건을 사다 주었다. 콜은 이반에게 가끔 어려운 과제를 요했다. 목표가 그의 신분으로는 살 수 없는 진주 귀걸이에 다다를 즈음 이반은 도둑질을 하고 있었다. 콜의 서랍에는 이미 값비싼 장신구가 널려 있었고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손에 쥘 수 있었는데도, 콜은 이반이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시험하려고 들었다. 이반은 늘 주인의 방을 청소하는 척 세 번째 서랍에 물건을 놓고 떠났으며, 콜은 같은 자리에 보상을 두었기 때문에 일련의 행위는 비밀스러웠다.

 진주 귀걸이를 서랍에 넣던 이반은 금장식이 들어간 편지칼 아래 조만간 버려질 봉투 겉면에 ‘다음에는 직접 달아 드리겠습니다.’ 라고도 썼다. 이반은 변덕스러운 아가씨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잘 알았다. 그리고 콜이 이 저택에 있는 이상 자신이 또다시 버려질 일은 없겠다는 고양감을 느꼈다. 콜이 이반의 키를 넘고 나서도 마르티네스 부부는 돌아오지 않았다.





3

 

 아가씨의 그림자가 되는 동안 이반은 가벼운 이별을 몇 차례 경험했다. 이반을 지켜보거나 거들던 사용인들은 조모의 건강 때문에, 출산과 결혼 때문에, 겨울에 고열을 앓다 죽어서, 그 외 가물한 이유로도 이직했다. 이반은 늘 가장 먼 곳에서 짐을 들어주었다. 그들은 이반의 가족처럼 당연하게 목적지가 있는 것 같았다. 이반은 그들처럼 단촐한 짐을 챙겨 언덕을 넘고 다른 이들이 자신을 배웅하는 상상을 덧그렸다. 그들이 그립지는 않았다.

 콜 부인도 저택을 떠났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반은 콜의 딸보다 일찍 직감했다. 지나는 어머니보다 하인과 말을 오래 나누는 걸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허전한 환경에서 자랐다. 누가 사라져도 눈치채지 못할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정말 사라진다면 당황할 아이. 콜이 그를 낳고 집을 자주 비우자, 이반은 앞으로 콜이 자신에게 숙제를 낼 일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늘 그렇듯 제자리를 지켰다. 어느새 이반은 장부 계산을 가장 잘 하는 소년이 되었고, 남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을 가르쳐주는 집사가 되었다.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동안 이반은 아침저녁마다 딸아이의 옷을 갈아입혀주었다. 지나는 콜처럼 조용히 팔을 벌린 채 거울 안을 들여다보았고, 이반은 모슬린 드레스의 옷고름을 정돈해주는 것을 연례행사로 여겼다. 이반은 지나의 공구를 주워주며 지나는 이반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선까지 컸다.

 이반은 지나의 새 구두를 맞추려고 장인을 불렀다. 단골의 구두 장인은 작고 구부정해도 목소리에는 힘이 있고, 머리를 턱선에서 반듯하게 자른 여자였다. 이반이 알던 것과 다르게 그날은 그의 딸이 동행했다. 한창 늙은 장인의 머릿결은 굽실굽실해졌다.

 “어머니께서 슬슬 거동이 불편해지셔서, 앞으로는 제가 물려받을 것 같아요.”

 “아직 한참 남았어. 그런 소리 안 해도 된다.”

 “그러고 보면, 꽤 오래 찾아주셨죠. 예전에도 뵈었던 기억이 납니다.”

 “마르티네스 씨는 여전하시고요. 처음 왔을 때에는 작았던 것 같은데… 아, 엄마. 꼬집지 마요!”

 “쓸데없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알겠다니까요! 마르티네스 씨, 새 구두는 필요 없죠?”

 “원체 깨끗하게 신어서 괜찮습니다. 뒤축도 멀쩡해요.”

 그는 이십 년 전부터 셔츠도 가죽 구두도 새로 고를 필요가 없었다. 재봉사의 대가 바뀌고 나서도. 사람들은 엎어지고 뒤바뀌며 움직이는데 이반의 발은 커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조금도 늙지 않았다. 모녀는 쾌활하게 몇 가지 유의점을 묻고 돌아갔지만, 이반은 영 일이 끊나지 않은 기분이었다. 부모님과 콜을 기다리고, 제자리를 찾으면 나아질 거라는 바람 이상으로 유쾌하지 않은 직감이 들었다. 이 일을 몇 남지 않은 동료 중 하나에게 털어놓았더니 계속 음식을 깨작거려서 그렇다든가, “마르티네스, 넌 늘 그대로구나.” 하고 웃어넘기기만 했다. 왜 아무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 걸까? 그는 점차 늙고 닳아 사라져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이 진실을 보지 못해 미쳤다고 생각했다. 왜 자신은 이곳에서 이름을 지울 수 없는지도 고민했다. 지나가 새 구두를 신으며 잘 맞는다고 말하고 나서도, 그의 주인과 둘이 될 때까지도 답은 찾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처음으로 주인에게 거짓말을 하고 외출을 나섰다. 콜이 가끔 가리키며 “직접 뛰어 넘어가보고 싶어.” 라고 말했던 담장 아래의 구멍으로 달아난 것이다. 이반은 그동안 제자리걸음을 했던 이유가 자신이 변하지 않은 탓일 거라며, 가장 큰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홀로 남겨질 지나에게 목공용 나무를 구해다 주는 상인에게 물을 것이 있다며 둘러댔다. 지나는 한참 조용히 입을 달싹이다가 별말 없이 끄덕였다. 가진 것은 없었고, 짐은 남김없이 챙겼는데도 이상하게 남겨진 지나의 얼굴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정문이 아닌 숲으로 떠난 건 그 건너편에 해답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이반은 처음 수풀을 밟고 나서 자유를 쟁취했다고 생각했다. 아예 영영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높게 선 나무들이 무성하게 일탈을 숨겨주었다. 구름이 껴 바닥에서부터 습기가 올라오자, 이반은 오늘 나무를 구하러 갈 수 없는 날씨라는 걸 짐작했다. 지나는 이반의 거짓말을 눈치챌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반은 다시 나이테를 보고 길을 찾는 법을 상기했다. 몇 시간을 걸어 숲을 넘어가면 도심에 빠르게 접근할 수 있고, 이반이 잠깐 묵었던 여관을 찾아 연줄을 대볼 계획이었다.

 이반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강을 건너고, 사과를 씹으며 나무껍질에 칼을 그어 표식을 남겼다. 아버지는 아예 나를 잊었을까? 어머니는 계속 글을 쓰고 계실까? 물음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나 해가 질 즈음에도 이반은 건물 하나 보기는커녕 숲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반이 기시감을 느끼고 제자리에 멈춰선다.

 땅에서 솟아난 무언가 이반의 발목을 단숨에 잡아채 당겼다. 순간 솟아난 아픔은 다리가 아닌 심장을 옥죄었다. 나는 지금까지 실패해본 적 없는데, 지금은 누군가 내가 잘못되었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왼발이 중심을 잃어 강하게 이마를 찧었다. 족쇄는 소름끼칠 만큼 축축하게 종아리를 타고 기어오른다. 피가 흘러도 아프지 않은데 살의는 명백하게 느껴졌다. 

 “아니야!”

 이반은 아무 잡초나 움켜쥐고 허둥거렸다. 주인을 섬기지 못한 벌이라면 진작에 내려주시지. 이미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떠나버렸는데. 시야가 핑핑 돌아 몸을 웅크리고, 다리 근처에 팔을 휘두르며 이반은 부디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길 간곡히 하늘에 빌었다.

 이반은 신의 존재를 믿고 가르침을 새길 뿐, 길은 스스로 내는 거라 곧게 믿었다. 그간 저지른 업은 죽은 뒤에나 심판받는다고 생각했다. 신은 자신이 성실하기만 했던 시절에도 보답해주지 않았고, 귀걸이를 훔쳐도 방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필연을 거스를 힘이 필요했다. 이반의 기도를 들어준 것처럼 밧줄은 끊어졌다. 인대가 늘어나고 발목뼈가 나간 것만 같았다. 더듬거리며 퉁퉁 부어오르는 복사뼈를 매만질 즈음,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이반?”

 엉망이 된 이반의 위로 지나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나절을 걸어 도착한 숲의 초입에서 모든 긴장이 목울대를 내리치고, 동시에 덜컥 내려앉는다. 이반은 창백하게 질린 채 바닥을 짚고 중얼거렸다. “콜.” 누구를 가리키는지 불투명했다.

  “…다쳤어요?”

 “아,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오다가 길을 헤맸어요.” 이반은 재빨리 머리를 헝클어뜨려 쓸린 자국을 가렸다. 게다가 욱씬거리는 통각이 비정상적인 속도로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반은 지나가 자신을 문책한다면 어떻게 변명할지 여러 대안을 골라냈다. 지나는 한참 눈치를 보면서도 본심을 숨기지 못했다.

 “상처가 깊은데요.”

 “괜찮아요. 보시겠어요?”

 지나가 걱정스레 가리킨 바짓단을 들추면, 어느새 상처는 씻은 듯이 옅었다. 벌어진 피부가 오물거리며 닫히는 것이 얼핏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지나는 놀란 채 말끝을 늘어뜨렸다.

 “그렇네요.”

 이반은 몸을 일으키며 나뭇잎을 털어내고, 짐을 들고 정중히 미소지었다. 콜 부인은 더이상 없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는 지나 콜이었다.

 “그대로 계시면 드레스 밑단이 젖어요. 들어갑시다. 음, 대신 저녁은 가볍게 먹을까요.”





4

 

 다친 발목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고, 몇 시간 덜렁거리다가도 자고 나니 감쪽같이 아물었다. 이반은 자신의 세월이 묶였다는 걸 깨달았다. 발을 휘감은 붉은 자국은 꿈에서만 본 게 아니었다. 이반은 숲을 떠날 수 없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당시 상흔의 원인은 날카롭게 살을 할퀸 만큼 굵고 단단한 나무 뿌리 같기도, 나무 껍질 치고는 무늬가 촘촘한 뱀의 몸통 같기도 했다.

 주인은 한때 이반을 이 집에 머무를 수 있게 하는 구실이었다. 이제는 지나도, 콜에게도 자신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잘 안다. 지나가 홀로 남겨진다 해도 달라질 것 없다. 지나는 계속 나무를 깎고, 풀을 바르고 못질을 하며 제자리에서 지낼 것이다. 목걸이를 걸어줄 사람이 없어도 지나는 신경쓰지 않을 것 같았다. 밀물이 천천히 들어오듯 지나는 저택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불순물은 자신 같았다.

 그런데도 이반은 집에서 떠날 수 없다. 기다리는 사람도 돌아오지 않을 텐데. 이반은 지나가 자신에게 의지할수록 빈 자리를 잘 찾아갔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떨쳐내고 싶었다. 그는 여전히 달력을 계산하며 지나가 앞으로 더 살 날을 세어보았다. 적어도 자신보다는 길 것이다. 이반은 달력을 치우고 서재에 들어갔다. 이미 지나의 점심식사는 가져다 주었고, 그는 다시 작업에 골몰할 터였다. 이반은 손을 뻗어 책등을 죽 쓸었다. 장르와 작가, 제목으로 책에 보이지 않는 라벨을 매기거나 책장에 먼지가 내려앉지 않도록 쓸고 닦으면 그나마 잡념이 달아났다. 이반은 나란히 꽂힌 전집 중 불룩하게 튀어나온 책을 빼냈다. 그 뒤에 못 보던 검은 표지의 책이 끼어 있었다. 건실한 책이라기에는 낱장을 엮은 매듭 처리가 조잡했다. 이반은 알맞은 자리를 찾아 꽂을 생각으로 첫 장을 펼쳤다가 헌사에서 멈췄다.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를 믿는다지요.*

 나는 내가 미련하게 품고 있던 악을 지면 위에 모두 내던지고 떠나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내 과오를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준 벗, 콜에게 바칩니다. 머피.

 그 책 안에는 이반이 바라는 가설들이 들어 있었다. 글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었지만, 이반은 당장 성흔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이반은 귀를 문지르며 방으로 책을 가져와 서랍에 있던 편지묶음을 꺼냈다. 한 장과 필체가 맞았다.

 이반은 일주일을 들여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고모할머니의 책을 암기한 뒤 벽난로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불이 책을 달굴수록 표지는 더욱 단단해지고 불길한 빛이 났다. 장작더미에 물을 들이붓자 책의 열기는 곧바로 쥘 수 있을 정도로 날아갔다. 발로 짓밟아도 구겨지거나 찢어진 자국은 감쪽같이 펴졌다. 저주와 해답의 연결고리와 고난을 동시에 마주한 기분이었다. 이후로 그는 가능한 무엇이든, 사람 말고는 무엇이든 불 속에 집어넣었다.

 지나가 물려받은 목걸이를 망치로 내려쳐도 멀쩡하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 이반은 다른 가능성을 시행해보기로 했다. 그러기 전 목걸이를 돌려놓으려다 들킨 이반에게 지나는 목걸이가 필요 없다고 했다. 이반은 지나에게 의미 있는 것과 무의미한 것을 구분해보려고 노력했다. 지나는 매번 옛 물건을 뜯어내고 고쳤다. 그렇다고 완성한 물건이 아주 가치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엄마는 신경 쓰지 않으실 거예요.”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 처음이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건…….”

 지나는 늘 오래 말을 골랐다. 이반은 인내심 없이도 지나를 기다릴 수 있었다. 콜이 지나를 낳았을 때, 이반은 먼발치에서 갓난아이가 묵묵히 산파의 품에 안겨있다가, 한참 뒤 엉덩이를 맞고 나서야 겨우 울음을 터트리는 모습을 보았다. 주변 사람들도, 콜도─사실 콜은 잘 모르겠다─, 지나가 금세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나는 이반과 함께 가장 오래 이곳에 남았다. 그러니 목숨을 재는 것에 비하면 훨씬 쉬웠다. 깍지 낀 손을 아래로 내리는 동안, 지나는 한 번 더 의외의 답을 냈다.

 “역시 이런 건 한심한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이반은 단숨에 답했다. 지나를 위로하기 위해 부정한 게 아니었다. 지나에게 앞으로 괜찮을 거라고 말해줄 수도 없었다.  아이였던 어른의 말이 별 목걸이를 손에 든 이반을 깨웠다. 이반은 지나에게 옛 주인님은 지금의 주인님을 사랑하셨다고 말해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진실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집을 떠날 단서를 골라내기 위해 지나를 관측한 결과가 결국 동류의 것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데도 속내는 명확했다. 두 사람은 아이인 채로 남겨졌고, 이반은 차라리 지나처럼 생각하고 싶었다. 눈높이만큼이나 닮은 처지에서 이반은 기묘한 탈력감을 느꼈다. 그는 여태껏 지나에게 다른 기대를 걸고 있었다.

 “진정으로 한심한 건…….”

 이반은 드물게 지나의 시선을 피하며 보석함을 정리했다. 떨어진 루비를 줍고 얼마나 하인들이 가져가고 잃은 건지 허전한 상자를 잘 닫아 서랍에 집어넣었다. 지나가 입을 다무는 것처럼 이반은 어물거리다가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지나가 무슨 마음으로 남겨질지 이반은 짐작하지 않았다.





5

 

 당신도 써보세요.

 지나는 이반의 사소한 말로도 걱정하고 불안해졌기 때문에 이반이 실제로 내뱉지는 않았다.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써보라고 했다. 이반은 지나가 궁금했다. 그리고 지나의 글에도 힘이 담겨있다면 훨씬 손쉽게 문제를 해결하고 떠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별 소용은 없었다. 지나의 일기는 지나의 처지만 돌아보게 되었다. 그래도 이반은 어쩐지 괜찮았다.

 “왜 이반은 여길 떠나지 않나요?”

 “주인님께서 여기에 계시니까요.”

 지나는 핑계 속에 담긴 의미를 헤아려보며 왜 자신에게 이리도 친절하게 대하냐고 물었다. 이반은 또 아무렇지 않게 지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면 안 되나요?” 지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반도 왜 상냥하고 묵묵한 집사 행세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반이 받아새긴 숙명은 이곳에서 좋은 사람으로 지내는 것이었다. 캄캄한 빗장에 갇힌 탈선 욕구를 풀어내려도 정직하게 흘러갈 관성. 착한 아이로 스스로 포장하지 않아도 이반은 지금과 같은 모습일 터였다.

 이반은 성실하게 자신이 떠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얼버무려 설명했다. 주인님이 여기에 있는 걸 넘어, 자신이 원하는 게 아직 이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나는 그게 무엇인지 물었지만 이반은 어깨만 으쓱했다.

 “이 집에는 그런 사람이 없어요…….”

 “주인님이어야 합니다. 본받을 정도로 외로움을 모르는 분은 주인님밖에 없는 것 같거든요.”

 “외롭진 않았는데요. 꼭 외로워야 하나요…?”

 “글쎄, 오래 홀로 계셨으니까요. 언젠간 그렇게 될지도요.”

 지나가 이반에게 진심으로 답을 구할 때에는 나름의 위안이 되었다. 이반은 가끔 자신을 잃고 난 지나를 상상했다. 그도 이반이 이곳에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반은 가끔 지나의 외로움을 깨우쳐주는 식으로 심술을 부리다가, 늘 그렇듯 친절하게 판자를 옮겨주고 못을 내밀었다. 알게 모르게 지나의 초조함은 솟아오르고 있었다. 

 “함께 떠납시다.”

 지나가 수첩을 반절 채웠을 즈음 이반은 제안했다. 이반이 무례하게 단언해도 지나는 목 마른 낯으로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요지는 이반마저 저택을 떠나려고 하는데, 지나를 홀로 두기에는 마음이 쓰인다는 것이다. 이반은 지도를 찾아보고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 목적지를 여러 곳 정해두었다고 했다. 그런 이반이 금세 짐을 꾸려 훌쩍 떠날 것처럼 말했으므로 지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혼자만 아니면 될 것 같았다. 이반도 그랬다.

 두 사람의 지붕이 되어주던 저택의 짐은 가방 세 개로 추려졌다. 이반이 하나, 지나가 두 개. 이반이 지나의 것을 하나 거들어 양손에 든다. 창살로 된 문을 밀고 집사가 나서면 주인은 손을 쥐고 따라나선다. 문턱을 넘어 양달을 밟는 순간 지반이 진동한다. 햇볕을 받아 무너지는 창살, 장막이 걷히는 이반의 얼굴. 이반은 비로소 어린아이의 가면을 헐벗고 섰다. 땅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다리를 잡아끄는데도 이반은 날개를 단 것만 같았다. 지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폐허가 되고 만 대저택보다, 비로소 장막이 걷혀 늙고 만 이반보다 자신이 더 초라했다. 이반은 원래의 궤도에 오르고 나서도 한결같이 지나를 다독였다. 이제 괜찮을 테다. 우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갈 것이다. 더이상 외롭지 않아도 된다…….

 “해가 뜨는 곳으로 가요, 지나.”

 진위는 따지지 않았다. 사실 날씨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지나는 이마에 차양을 냈고, 이반은 비로소 후련하게 웃었다.






* 잠언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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