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풍선
2022. 4. 13.

 

초여름 풍선

 

 

1

 

 불청객은 비가 내리는 새벽에 찾아왔다. 다유는 떡갈나무와 은행나무가 섞인 활엽수들 사이로 걸어나와 진흙이 덕지덕지 묻은 옷을 털어냈고,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 노력했다. 모자를 벗어 2층 집을 올려다보며, 그는 지저분한 뺨을 훔쳤다. 다유는 옷깃을 가다듬고 헛기침을 한 다음에야 문을 두드렸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를 정도로 배를 곯은 탓에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것만 같았다.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어도 집 주인이 잠귀에 밝다는 행운은 통한다. 윗층에서 커튼을 걷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고, 눈두덩이를 때리는 빗줄기에도 굴하지 않고 일부러 미소지었다. 유리창 너머로는 엉겨붙은 먼지가 붙은 거미줄 같은 머리카락에 핏빛 루비 같은 눈이 두 알 박혀 있었다. 주인은 고개를 홱 돌려 커튼을 친다. 무엇에 걸렸는지 물건이 날카롭게 넘어지고 깨지는 소리가 났다. 다유는 섬찟한 마음에 굳었어도, 당돌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다유는 인내심 없이 주위를 맴돌다가 한 번 더 물었다. “미안합니다, 놀라게 할 의도는 아니었어요. 혹시 다치셨나요?”

 꿋꿋이 세 차례를 더 묻자 안에서 새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아,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오지 마세요.”

 “음, 염치 없지만 정작 제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실례지만, 그러니까. 윽…….”

 발을 딛느라 오래된 나무가 뒤틀리는 소리가 가까워져 다유는 마지막 힘을 긁어모아 기대를 걸었다. 지친 몸을 기둥에 기대고 있으면, 녹슨 경첩이 시끄럽게 흔들리며 문이 열렸다. 주인장이 등불을 들고 딱딱하게 말했다. “무, 무슨 일이신데요?” 햇빛을 쬐면 녹아버릴 것처럼 눈보라를 닮은 사람이었다. 그는 달을 떼어 빚은 것처럼 새하얗고 젊었다. 나이에 비해 연식이 있는 숄을 어깨 안으로 끌어당기며 경계하고, 목은 잔뜩 움츠렸다. 다유는 최대한 호감을 사기 위해 차갑게 식은 손으로 흐트러진 안경을 고쳐썼다. 다른 팔은 옆구리를 감쌌다.

 “나는 바다 건너에서 출발해 세상을 떠돌고 있는 방랑자입니다. 그런데 일주일 전 강도를 만나는 바람에 멀쩡한 옷은 한 벌에, 짐은 죄다 빼앗겼지요. 어제 비마저 내린 탓에……. 지금은 이렇게 되었어요.”

 주인은 빗물과 다른 비린내를 맡았다. 뜨겁고 눅진한 피가 배어나온다. 짐승에 들이받쳤거나 칼에 찔렸을 상처였다. 게다가 이 불청객은 며칠 씻지도 못한 듯 지저분한 생쥐 꼴이었다. 고동색 바지에 헐렁한 셔츠만 입은 영락없는 여행객이었으나 상태는 심했다. 목련은 구질구질한 냄새에도 신경쓰지 않으려 애쓰며 제 팔을 감쌌다. "그래서요?" 사람을 피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잠시 신세를 질 수 있을까요?”

 “그건…….” 무언의 갈등이 안색 위를 오간다. 다유는 가슴에 손을 얹고 정중하게 말했다. “무슨 수로든 보답할게요, 눈 붙이고 잘 곳이 없다는 것 말고는 다 할 수 있거든요! 무엇이든……. 사실 서 있는 것조차 버겁습니다.” 금품이라도 달아두려는 듯 주머니를 뒤적이는 손길이 서툴러 늘어진다. 발바닥에 달라붙은 피로로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린다. 처마 아래에서도 기침을 뱉는 소리는 선명했다. 부상자의 어깨는 초라했고, 여자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모른 체 할 만큼 매정하지 못했다.

 “조건이 있어요.”

 다유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든다.

 “눈을 붙이고 나면 말할게요.”

 “고맙습니다.” 그는 비켜선 자리로 물 자국을 내며 들어섰다.





2

 

 목련은 주방에서 다기를 꺼내 쟁반에 받치고, 난롯가에 물을 끓였다. 세월에 무뎌져 잔금이 보이는 주전자가 데워진다. 직접 꺾어 말린 허브를 걷어와 둥근 테이블에 올려놓고 몇 분 우려내면 그만이라, 잘 닦인 잔에 담긴 찻물을 바라보는 눈길에서 안정감이 묻어났다. 목련은 밤이 되기 전 벽난로를 떠나 계단을 오르던 찰나, 다유가 방 안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말을 거는 것보다 입을 다무는 게 훨씬 편했기 때문에 목련은 조용히 지켜보았다. 더군다나 곧 해가 지기도 했다.

 목련은 나고 자란 곳은 어느 뒷골목의 빈 집으로, 천애고아인 그를 여러 어른이 나누어 키웠다. 그 골목가에는 도심으로 나갈 수 없는 사람들이 좁은 구역을 비집고 살았다. 지주에게 쫓겨난 소작농, 굶주려 빵을 훔치다 수배에 걸린 청년, 하물며 지붕 없이 떠돌다 지쳐 이곳에 정착한 사람도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불길한 아이는 그 골목에 잘 어울렸다. 그들은 은둔한 예언자—목련이 글을 배울 때에는 다들 이미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를 중심으로 조합과 비슷하게 이득을 도모했다. 소외되었던 그들 중 몇몇은 목련처럼 꼭 이상한 마법을 한두 가지씩 부릴 줄 알았다. 앞집의 파비는 직접 씨앗을 묻으면 빠르게 열매를 맺었고, 세희는 깨끗한 물을 솟아나게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점을 늘려 돕고 살기로 정했다. 메마른 땅에 물을 붓고, 씨를 심는 것처럼. 서로 신뢰를 주기 위해 숨기지 않기로. 그들은 함께 아이를 키웠고, 목련은 사랑 받고 자랐다. 그래도 목련은 마을과 자신 사이에 담을 쌓고 지냈다. 그는 스스로가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창백한 아이가 지닌 마법을 가리켜 신이 내린 축복이라고 위로했다. 지금의 그는 악마의 피로 쓰인 저주라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목련은 밤이 되면 사라졌다가 낮이 되면 도로 나타났다. 그것은 신기루에 갇힌 모래바람 같기도, 흉가에 묶인 유령 같기도 했다. 목련은 작물을 자랄 수 없게 하는 천성이 싫었고,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건 더욱 무서웠다. 그래서 홀로 책을 읽거나 집안일을 돕는 일이 많았지만, 어른들은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등을 밀어줘 한 번은 숨바꼭질을 했다.

 목련은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해내고 싶었다. 주인이 없는 오두막 안, 잘 개킨 옷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장롱 안에서 숨을 참고 있으면, 땀으로 긴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었다. 목련은 웅크린 채 시간을 세어보다가 깜빡 졸았고, 아이들의 목소리에 깼다. “해가 다 졌잖아~ 못 찾겠어.” “하는 수 없지. 이 정도면 걔도 갔을 걸.” 목련은 박차듯 뛰어나가 외쳤다. “여기 있어요!” “진짜?! 어디?” 아이들이 신기하다는 듯 돌아보았고, 조금 뒤에는 눈썹을 찡그렸다. “여기, 여기요…!” 목련은 속도를 내 걸어갔다. 그중 하나가 가까이 걸어왔다. 목련이 가까이 멈춰설 때 소년 중 하나가 뒷걸음질로 물러나는 바람에 쿵 부딪혔다. 목련은 벌렁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입을 떼려고 했다.

 “방금 여기 있던 거 누구야?”

 “나 안 그랬는데!”

 목련은 어깨를 감싼 채 슬금 발을 뺐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느덧 주변이 어두워진 채였다. 목련은 긴장하느라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아… 날 못 봤겠구나. 그런 거야…….” 그는 투명해진 팔뚝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돌아갔다.

 그는 헝겊으로 엮은 주머니에서 바늘을 꺼내더니 손톱 아래를 찔렀다. 따끔한 듯 미간을 찌푸려서, 목련은 화들짝 놀란 만큼 꼿꼿이 굳었다. 그는 손을 뒤집어 보더니 입술을 깨물어 신음을 참고 벽면으로 다가갔다. 그 자리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이젤이 서 있었고, 다유는 그 위에 핏방울이 맺힌 손가락을 내리그었다. 피는 오차 없이 균일한 선으로 그어졌고, 새까맣게 타버린다.

 그는 저주를 직접 쓰는 사람 같았다.





3

 

 다유는 현관문을 다급하게 두드렸던 그날은 여유가 없는 얼굴을 했으면서도, 한숨 자고 일어난 다음에는 선뜻 활기를 찾고 집안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먼지가 쌓인 창고를 쓸고 닦았다. 식사를 자주 거르는 습관을 눈치채고는 나누어 먹을 미트 파이를 구웠다. 

 셔츠 절반을 적신 상처는 숙면을 취해도 낫지 않는다. 그래도 그는 가만히 있으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처럼 움직였다. 물론 다유는 언제나 태평하게 굴었다. 반듯한 얼굴선과 달리 손은 부르텄고, 그 손이 닿는 곳은 어디든 말끔해졌다. 특히 그는 정원에 나가 있는 일이 많았다. 팔을 걷어붙이고 새순이 난 배나무의 잔가지를 일일이 솎아내고 있었다. 뾰족한 덤불이나 잡초도 모조리 도려냈는지, 정원가위를 든 다유의 옷에는 풀물이 들었다.

 “그, 그냥 두셔도 돼요. 제가 부탁한 건 그런 게 아니었어요.”

 “아, 약속이요.”

 “네, 네에…….”

 입술을 짓씹는 목련에게 다유가 가위를 내려놓고 다가섰다. 송글송글 흘리는 땀을 소매로 훔치는 건 그였는데, 등골이 쭈뼛 선 건 반대였다. 피를 흘리는 그는 두렵고, 지금을 믿고 싶었다.

 “어긴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름은 묻지 않고, 여섯 시가 지나면 위층으로 올라오지 말고. 일주일이 지나면 떠나기로 한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지켜주세요.” 목련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유는 더욱 짚이는 것이 없다는 눈치로 턱을 문질렀다.

 “잘못한 게 있다면 사과할게요. 하지만 이건… 아, 설마.” 둥근 눈매에 장난기가 깃든 채 다유가 몸을 돌렸다. “대가로 뭐라도 요구할까 봐?”

 “…….”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다유는 낮게 눌러 참던 웃음을 터트리느라 상체를 숙였다. 하하! 목련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 두 주먹을 움켜쥔다. 다유는 재빠르게 손을 내저으며 사과했다.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냥 기뻐해주셨으면 해요, 그게 답니다.”

 다유는 그 길로 목련을 이끌고 꽃이 핀 언덕으로 데려가 주었다. 그의 주장으로는 짐승에 들이받힌 뒤 숨을 곳을 찾다가 반려한 장소라는데, 목련은 산들거리며 흔들리는 풀꽃이 반가운 만큼 의구심이 생겼다. 대가 없는 노동이란 없고, 그는 이상했다. 그가 아주 만일 자신에게 호의를 품었다면, 그것은 발 뻗고 잘 곳을 내어준 은혜에 불과할 텐데 과분한 선을 넘나드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목련은 밤마다 조금 갑갑했고, 돌아올 낮이 기다려졌다.





4

 

 “이렇게 들킬 줄이야. 해명하자면, 나는 태생으로부터 도망쳤어요. 태어날 적부터 내 눈은 천리안이 될 수 없지만 그만한 진리를 담아낼 수는 있었어요. 내가 흘린 피를 물감으로 삼아 화폭에 옮기면, 그 그림은 나 말고는 다른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이 ‘정직한’ 그림이 되던 탓입니다. 펼쳐진 책의 글자도 기억해 옮길 수 있고, 튀어나온 잔머리마저 어긋남 없이 반듯하지요. 원래 윗형제와 달리 권력에 관심 없고 미천한 바보 행세를 했기에 이 재능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러나 나를 내쫓고 싶었던 누군가는 여전히 있었던 모양입니다. 기밀문을 목격한 후 내용을 잊지 못했던 나는 멍청한 도련님 이상의 골칫거리가 되었고, 결국 이 신세가 되었죠.”

 “…….”

 “그렇다고 지금 쫓기는 건 아닙니다. 정말로 사슴 뿔에 들이받힌 거예요! 그런 해프닝만 아니라면 나는 지금이 훨씬 자유롭습니다. 허드렛일이 익숙하고, 이름을 묻지 않고 지내는 것도 익숙하죠. 당신을 남겨가려고 그림을 그리던 것도 아닙니다. 내가 떠나고 나면 당신은 나를 잊을 테니까. 그래요, 마지막 날에 보여드리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직접 태워주세요. 그림은 내가 청소를 하고 빨래를 너는 것과 비슷한 보답입니다.”

 “……마지막 날, 기억할 거예요.”

 “아가씨. 손가락을 걸까요?”

 “아, 손이 더러운데… 사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복잡해서요.”

 “괜찮아요. 이제는 무섭지 않은 거죠?”

 “네, 조금은. 지금은 다른 쪽으로… 혼란스러워요. 하지만 괜찮을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자, 말씀하신 열매는 다 땄어요. 돌아갈 채비를 할까요.”

 “그렇게 해요.”

 다유가 천을 댄 바구니에 베리나 딱딱한 열매, 씨 같은 것들을 쏟아부었다. 그가 싱긋 웃자 목련은 더듬거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두렵진 않나요?”

 “제가요?”

 “왜, 저희는 모르는 사이고. 도망치신 데다가 여태껏 숨기셨다고도 하셨잖아요.”

 “오해를 쌓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사실 오해하셔도 괜찮지만, 그건 당신이 불안한 일이니까요.”



 

5

 

 “눈을 감아주세요.”

 목련은 회중시계를 꺼내 남은 시간을 가늠해보고, 흰 손등을 위로 가게 내밀어 조용히 굳은살이 배긴 손 위에 겹쳤다. 다유는 그가 작지 않은 용기를 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도 그런 게, 홀로 살던 여자는 스스로 미다스의 불행을 짊어졌다고 생각했다. 닿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하는 기적. 미다스는 희생으로 부와 풍요를 가져다줄 수 있었지만—목련의 생각으로는 그랬다—, 그저 두려움을 설파하는 저주로는 그보다 못했다. 다유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서늘한 얼굴을 할까 봐 두려웠다. 그러니 모른 척 하는 것은 종의 몫이다. 다유는 문턱에서부터 이젤 앞까지 인도하며 사제처럼 걸었다. 그는 관습과 체제에서 벗어난 이방인의 행세를 했지만, 목련의 경계를 완전히 부수기에는 모자란 구석이 있었다. 집사의 자질은 부족할 데 없었다. 다만 그는 하인이 되기에는 잘 먹고 자란 태가 났고, 늘 평탄한 강 건너의 먼 곳을 바라보았다. 목련의 견식은 이름 모를 숲에 한정되어 있는데도. 목련은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다유가 무엇을 보여줄지 궁금하기도 했다. 코끝이 간지러웠다. 눈을 꾹 감아 잘 보이지 않아도, 햇빛이 살갗에 달라붙는 감각으로는 야외였다.

 “프리지아 향이 나네요.”

 “우리가 같이 돌봤잖아요. 만개할 시기가 되었더군요.”

 “저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진작 시들 줄 알았어요.”

 “빈말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당신의 몫이에요. 나는 종이고, 신은 거짓을 고하는 자에게는 벌을 내립니다.”

 “그럴까요.”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목련이 고개를 저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향한 거짓을 참지 못하고 감정적이더군요.”

 “불경하시네요……. 거짓말도, 아니에요.”

 “물론 믿고 있어요. 그 신이 당신을 저주한다면 곧장 내 스스로 혀를 자를 생각이었으니까.”

 “그런 말씀을.” 부정을 탄 벌은 이미 조용히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 그것을 모르는지, 혹은 알고도 모른 척 하는지 단정한 그가 하는 농담은 때로 위험천만했다. “진담이에요. 정 신경 쓰인다면 직접 칼을 들어주세요.”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과감한 부랑자의 행세를 했지만, 걷는 폼새나 포크를 드는 습관에서 티 없이 맑은 도련님의 태가 났다. 그럴 때마다 목련은 그의 외면에서 안전하고 미약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점차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햇빛이 내리쬐어, 뻣뻣하게 굳었던 팔에 힘이 빠지고 웃음이 났다. 다유는 낡은 의자를 끌고 와 긴 곱슬머리를 등받이 뒤로 넘겨주고 앉혔다. 말씨와 달리 안주인을 떠받드는 행동은 살뜰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요?”

 “조금 더요.” 그는 더 캐묻지 않고 데이지를 닮아 엷은 천을 잘 펴서 다리에 덮어주었다. 목련은 슬슬 손바닥 위에 놓여 그가 자신을 놀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도 호의를 받아들였다.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 태도가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목련은 다유가 팔을 움직이는 대로 실을 매단 관절 인형처럼 두 손을 내렸다. 그는 그새 자신의 흙먼지가 옮겨 붙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가냘픈 어깨를 털어준 다음에야 물러났다. 목련이 마침내 눈꺼풀을 들어올려 정면을 바라보면, 정원 한가운데 흰 천이 덮인 이젤이 놓여 있었다. “헉.” 목련은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손끝을 바늘로 찔러가며 백지 위를 휘젓는 일련의 행동, 다유가 벌였던 기행의 정체를 끝까지 들추어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산들바람이 한 차례 봄의 들꽃들을 휩쓸고 지나가자 그는 더 미루지 않고 천을 걷어냈다.

 에칭으로 떠낸 것처럼 섬세하게 그려진 나무 한 그루였다. 삼십 년 된 것 같은 나무 위로는 둥글게 부풀어가는 꽃이 개화를 기다리며 웅크린다. 몇 개는 앞서 피어 아래로 풍성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검은 줄기는 까칠하지 않고 매끄러운 나뭇결이 세밀해 그려냈다기보다는 찰나를 포착했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았다. 목련은 그 나무를 가리키며 목련의 숨이 멎을 것 같아 다유는 무릎을 꿇고 손을 잡아주었다. 상처를 감추려 얇은 천을 감싼 손가락마저 따뜻해, 목련은 슬그머니 피했다. 공포와 안도가 교차했다.

 “알고 계셨어요?”

 “당신도 태양을 등지고 북을 바라보잖아요.” 그는 그 나무와 목련이 닮았다는 사실조차 장황하게 말하며 시원하게 웃었다. 바람 때문인지 눈이 버석버석 말랐다. “미안해요. 울지 말아요.”

 “왜 저한테 이런 걸 주세요?”

 “마땅히 받아야 할 값이니까.”

 대화가 이어지는 대신 가느다란 팔이 남자의 목을 끌어안는다. 주인이 옷깃에 얼굴을 묻는 그대로 그는 굳어버렸다. 다유는 머뭇거리다 제 팔을 둘러 목련의 어깨를 안았다. 그의 주인이 말한다. “저는 누가 아픈 그림은 싫어요. 다른 답이 듣고 싶어요…….”

 “당신의 울타리에 많은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리는 내내 내 마음이 나아졌어요. 진심으로요.”

 그 순간 목련은 비로소 다유의 숨으로 살아났다. 가슴 한 구석의 박동을 헤아릴 수 있게 된 건 팔을 풀고 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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