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퍼 씨에게.
안녕하세요.
걱정하시던 것과 다르게 이브에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편지가 지구에서 유로파로 오기까지 꽤 오랜 기간이 필요했겠지만, 도리어 크리스마스라 소포가 많아 배송이 빨랐을 지도 몰라요. 다행이지요.
저는 일 년 전 말씀 드린 것과 다를 바 없이 지냈습니다. 원래 여행을 마치면 오시리스에서 지내게 될 예정이었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는 유로파에서 계속 있기로 했어요. 연구를 보조하고 어깨 너머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가끔 하퍼 씨가 생각났어요. 어느 정도 비슷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건 이야기 할 거리도 많다는 의미니까요. 그래도 연락처가 있어 가끔 전화는 드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제것만 남기고 하퍼 씨의 것을 받지 않았더군요. 예상 외의 실수였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연락을 기다리는 건 아쉬운 일이지 않던가요. 근황을 적어주신 것도 잘 읽었어요.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평할 수 있다는 의미고, 더 나은 것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 유로파의 하늘은 구름이 잘 끼지 않는데 바닥은 항상 얼어있어 미끄럽죠. 꿉꿉한 독일 날씨와 다른 것도 같아요. 사람들은 추위 속에서도 걸음을 바삐 하고 저도 그 사이에 끼어있어요. 하지만 뉴스를 통해 접하는 지구보다는 한적해요. 여기서 일하신다면 조금 우울한 감상이 달라지지 않을까 합니다. 어떠신가요. 음, 이게 하퍼 씨의 제안을 받은 제 기분이었어요.
언젠가 어머니의 일에 제대로 함께하게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이곳에서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아요. 다른 분께서는 미국의 대학을 권유하셨어요. 그때가 되면 아마 지구에서 지내게 될 지도요. 그러면 하퍼 씨와 다시 만날 수 있겠죠. 이미 일궈내신 길을 가까이서 볼 수도 있을 테고요. 이렇게 말하면 매정한 걸까요. 신기하고 감사한 마음이 앞선 만큼 다른 말을 해봤습니다. 그도 그런 게, 캐러네이드 호에서 저를 대하던 하퍼 씨의 모습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새삼 하퍼 씨는 많이 변하신 것 같아요. 여유를 되찾으셨기 때문인지요. 날설 수밖에 없었던 극한의 상황을 기억합니다. 아이 취급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 말씀은 같은데, 예전과 지금의 감상이 다릅니다. 편지에 기대면 하퍼 씨가 원하시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희는 함선에서 난처한 일을 많이 겪었고, 그렇기에 여유가 없었잖습니까. 더군다나 손편지는 구식이지만 그렇기에 더 솔직해지는 것이 아니던가요.
저는 연구소 일을 그만두고 오시리스에서 평범히 학교를 다니는 것이 어떻냐고 권유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살고 계신 아버지를 거절하기 위해 캐러네이드 호를 탔고요. 안전이 확보되지 못한 만큼 중간은 좋지 못했지만, 그만큼 끝은 좋을 게 당연했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유로파에서 지내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실 테니까요. 저는 그래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 외에는 특별한 감상을 느끼지도 않았고, 걱정할 것도 없었습니다. 비록 다른 분들께 배울 것은 많았지만 별개로 제가 바라보고 있던 곳은 아예 다른 곳이었어서요. 그런데 그동안 많은 분들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특히 하퍼 씨가 그랬죠. 제가 이 위험을 자초한 자라 의심 받을 거라곤 생각치 못했고, 하퍼 씨는 저를 아이로 보는 동시에 성인으로 취급하셨으니까요. 처음에는 사과 드렸지만 하퍼 씨가 그만큼 저를 좋게 평가해주시는 거라 믿고 크게 해명하지 않기로 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도착한 편지를 읽고 나니 묘한 확신이 생기더군요.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내도 이해해주세요. 결국 논지는 기껍다는 의미니까요. 아예 잊는 쪽이 더 불공평합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가족과 모여 파티를 하기로 했어요. 그렇게 화려한 건 아니지만, 연구소 직원분들과 가족들이 모인다 합니다. 어제는 트리를 장식하는데 가장 높은 자리의 별을 다는 게 그렇게 힘겹지는 않았어요. 생각보다 키가 작은 편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편지를 부치고 나면 손님을 맞아야겠죠. 함께하지 못해 아쉽지만 다음 해에는 독일로 여행갈 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에는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하루 정도는 시간을 내어주세요.
하루 만에 편지가 도착하리라 기대하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난 후 읽어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메일이나 영상 대신 직접 적습니다. 아쉬우실 즈음 열어보실 편지가 두 배로 더 반가울 거라 믿어요. 물론 답장은 성심껏 고른 편지지 대신 목소리를 들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기회로 자주 안부를 주고 받는다면 기쁠 겁니다.
그러면 메리 크리스마스.
다음 해에도 뵙겠습니다.
2078년 12월 25일
이반 마르티네스 드림.